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씨와 누룩의 비유 (마 13:24-33)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3-24
조회수 3436

 

씨와 누룩의 비유 (마13:24-33)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1. 신앙 세계 안에서 밀과 가라지



세상에서 성공과 실패는 모든 사람이 같은 일직선상에서 동시에 출발하고 경쟁하여 승패를 가늠하는 것으로 대변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곡식과 가라지’는 믿는 자들 안에서의 구분입니다. 신앙 세계 안에서도 마귀가 뿌린 가라지 씨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뿌리신 좋은 씨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밀알’로써 부름을 받고 알곡의 신앙생활을 하는 은혜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은혜로운지요.

신앙생활 안에서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다는 말씀은 어찌 보면 부담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밀알로 택함을 받고 싶지, 가라지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기는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농촌에서 모내기 할 때 원래의 모종보다 피가 더 굵고 빠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실제로 우리의 신앙 세계 안에서도 이 두 가지 다른 씨가 함께 자라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식물도 독초나 나쁜 것 일수록 더 빨리 왕성하게 자라듯, 신앙 세계 안에서도 가라지가 더 크게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가라지는 마귀가 뿌린 씨이고, 밀은 당신이 뿌린 씨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우리 각자가 알곡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 그렇다면, 알곡이 되기 위한 바른 신앙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내가 주님의 택함을 받아 밀의 씨로서 이 땅에 뿌려진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주변의 신앙이 세상과 혼탁하게 섞여있다면, 이들과 나의 신앙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일대일의 온전한 관계를 정립하며 심판의 때를 똑바로 눈앞에 둔 신앙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길, 심판 때 가라지는 불에 던지고 알곡은 추수해서 당신의 곳간에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알곡은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만드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 겨자씨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 비유에 이어 31절부터 또 다른 비유를 들고 계십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들어서 천국을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로 담배씨만큼 작습니다. 우리도 주님 일을 하는 동안 수많은 어려움에 늘 직면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도 팔레스타인 시골의 작은 곳에서 일하실 때를 상기해 보면 힘이 됩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작게 출발하셨습니까! 또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눈에 주님 하시는 일이 얼마나 우습고 가소롭게 보였을까요.

우리 역시 주님 일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제도권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일이 척척 진행되지 않을 때면, 스스로 위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처음은 겨자씨만큼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라면 나중에 큰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가 깃들 정도로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시작도 그러했습니다. 처음 신앙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은 고작 100명이 조금 넘는 수였습니다. 그나마도 절반이 풍토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들은 그 정신과 신앙만으로 새로운 삶을 일구어 나갔습니다. 미국이 하나의 국가로 탄생한 것이 겨우 250년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를 제패하는 국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늘나라 역시 처음엔 이처럼 초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치자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하나의 작은 무리로 보였고, 당시 온갖 핍박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바알세불이라는 소리도 들으셨지만, 하늘나라가 당신의 희생으로 인하여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즉 당신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주 만물이 구원 받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 중에서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나 작고 무기력하여, 신앙생활 안에서도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시선을 자기 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둔다면, 그 시작이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약하지만, 나중에 심히 창대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출발점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가루 서 말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다는 비유도 하셨습니다. 요새는 반죽을 할 때 누룩을 잘 넣지 않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밀가루 반죽을 할 때 누룩을 조금 넣어서 치댔습니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활 속에서 그대로 가지고 오신 비유들은 복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복음 말씀은 처음에 볼 때 별 거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 그 누룩 같은 복음이 삶의 곳곳에 침투하여 우리 지상의 삶을 하늘나라의 것으로 변화시킵니다.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사는 수도생활은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세상으로 나갔고, 그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그저 내버려두기만 하면 무조건 썩게 되어 있는데, ‘소금’의 기능은 썩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3. 소금과 빛의 삶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산다면,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간에 그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만 기도하고, 집단 안의 편안함을 누리기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신앙은 지키기 쉬우며, 얼마든지 고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여러분이 예수님의 복음을 교회 바깥에서 전파하려고 해보십시오. 당장 나를 긁어대고 침 뱉는 사람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도, 예수님 믿으라는 전단지를 하나 전하려고 하면 상대의 태도가 바로 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빛은 또 무엇입니까. 신앙 밖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신앙생활 안에서도 사람들은 실제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막연하게 예배를 올립니다. 이들은 실상 이루 말할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살면서 저희들끼리는 ‘괜찮다. 안심이다’하면서 서로를 안위합니다. 이들은 결국 심판 때에는 그 대가 또한 받아야 할 텐데, 주님이 보시기엔 이들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의 참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꼭 예언하고 치유 능력이 나와야만 성령 충만은 아닙니다. 이들은 부수적인 것이며, 주님을 못 만난 이들이 내 마음에 사무치게 애절한 마음으로 보아질 때,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으로 주님 일을 하는 것이라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4.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의 군사로 산다는 것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책망을 듣는 장면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은 후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며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두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 셨습니다.

이는 곧 그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 세상 걱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 예수님께로부터 음부를 이길 권세를 받으리라, 천국의 열쇠를 받으리라고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였건만, 다음 순간 그가 이러한 질책을 들었다는 것은, 세상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간에 한마디로 사탄입니다.


세상의 것을 온전히 버리고 예수님 뜻만을 오롯이 좇는다는 것은 사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날 때부터 오감을 통해서 배우고 판단해왔고, 이 세상에서 사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체득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영의 세계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열어주신다면 영의 세계, 즉 3차원 세상의 상위에 있는 차원의 세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나라를 알려주시기로 택한 사람들을 통해 이 지상에 하늘나라가 확장되길 바라십니다.

이때 영의 세계가 세상에 파고드는 과정에는 고통과 아픔이 자연히 따라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 고 이르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밟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똑같이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상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이 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 땅에서 한알의 밀알로서 ‘썩어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이 따르는 게 오히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사람들은 사실 이 땅에서는 고난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까지 들어가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물 안 개인적 차원의 신앙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만큼 내가 기도했는데 왜 문제 해결이 안 되는가?’하며 내심 불평한다면, 이것은 자신이 아직도 육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반증합니다.

이 와 정 반대로, 내 눈에는 지금 당장 결과가 환하게 보이지 않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복음의 작은 씨를 뿌린다면 나중에는 엄청난 하늘나라로 도래할 것이라 앙망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설령 내가 이 땅에서는 희생만을 하며 인생을 마칠 지라도, 그 하나의 희생으로 수많은 영혼이 산다면 이것이 얼마나 훌륭한 삶입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땅을 일구어간 신앙의 선진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사도 바울의 발자취만 떠올려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는 이방 선교의 기수로, 그가 걸어간 길은 한걸음 한걸음마다 고난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동족들에게 망신당하고, 수없이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핍박당하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끝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다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보고 오직 그 푯대만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제자된 삶도 이 바울의 삶을 닮아야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바울은 이제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면류관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실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저 역시 주님을 만나기 전에, 또 스스로 정립되기 전에는 나 한 사람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았고,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인생’은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내 것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고 가실 수가 없습니다.

 

여 러분, 하늘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 땅에서 이미 우리의 삶이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됩니까.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면서 나의 사령관이신 예수님께서 ‘공격 앞으로!’ 하시면 앞으로 가고, ‘여기서 멈추어라’하면 멈추는 삶, 내게 주어진 자격이란 바로 이것 밖에 없고 나아가 이 자격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전심으로 인정할 때, 주님께서는 나를 쓰시기 시작합니다.

알파이고 오메가이신 주님의 뜻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만 순종을 할 뿐입니다. 순종하고 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그 가운데 하늘나라를 단편적으로 알아가게 됩니다. 내 한걸음 마다 희생의 발자취가 새겨진다면 먼 훗날 이 작은 겨자씨 같은 내 희생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 복된 그리스도의 군사로 날마다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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