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네 가지 밭의 비유 (마 13:1-9)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3-24
조회수 3698

네 가지 밭의 비유 (마 13:1-9)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 은혜로 허락된 주님과의 만남

 


우리가 만약 ‘구원’을 하나의 종교적 차원에서만 이해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아무 것도 이루시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에 따라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나갔을 때를 상상해 봅시다. 고기 잡는 일로 치자면 베드로는 그야말로 전문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고, 바로 그때 평생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건져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주님을 진짜로 만났을 경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보고 깨달은 것처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영을 열어주시면 환상을 보거나 꿈에서도 영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더불어 주님께서는 지식의 영도 함께 주시기 때문에, 받은 계시의 의미도 동시에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이렇게 영적인 모든 것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은혜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은혜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자, 이렇게 주님을 은혜로 만났다면, 그 다음 단계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분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여러 가지 종류의 밭은 그 대상이 일단은 구원 받은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두고 하시는 비유입니다. 즉 이미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에게도 각자 그 성숙한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밭에 비유될 마음가짐과 그 실천이 있다는 뜻입니다.

 

 

2. 길 가 밭 :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한 심령



가장 먼저 ‘씨가 길 가에 떨어졌다’는 비유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아주 딱딱한 땅에 씨가 떨어진 형국입니다. 싹이 트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땅을 파서 씨를 심고, 거기에 물이 스며들어야 하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 길 가 땅에 떨어진 씨앗은 그 땅 아래로 한 치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처음 뿌려진 그대로 땅 위에 남아 있습니다.

다시 영적으로 풀자면 이 길 가 땅은 하늘나라를 받기에 합당치 못한 딱딱한 마음을 뜻합니다. 비록 교회 안에 소속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아무 차이가 없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되 그 ‘말씀의 씨앗’이 도저히 그 사람 마음 안으로 파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상상할 때, 우리는 흔히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떠올립니다. 물론 주님께서도 말씀에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매우 비좁다고 말씀하셨으며, 따라서 성도의 길은 그 좁은 길을 따르는 삶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길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저 막연히 ‘좁은 길인가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계시로부터 이러한 깨달음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영성원에서 은혜를 받으시는 한 권사님이 주님께로부터 환상을 하나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넓은 길이 하나 있고 그 옆에 좁은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가는 길은 이 넓은 길도 아니고, 좁은 길도 아니다’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으셨던 장면, 또 걸을 때마다 발이 땅에 푹푹 빠져서 도대체 한 걸음을 옮기기 조차 힘든 또 다른 길을 보여주시더랍니다. 환상 안에서도 이 권사님이 주님 가신 길을 똑같이 따라 가려니 너무나도 힘이 들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길이 하늘나라를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장성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가신 발자취, 즉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똑같이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길가 밭에 떨어진 씨앗은 새가 와서 바로 쪼아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그 전제인 ‘심령의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적인 마인드가 고스란히 남은 상태에서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같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이가 회개를 모른다면, 하물며 어떻게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심령, 마음을 쟁기로 밭을 갈듯 싹 갈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 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마음 상태로는 아무리 말씀을 받아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을 힘 자체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나의 심령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허락된 자들에게만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듣기는 듣되,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복음이 너무나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음은 세상적 교훈과 견주어 비교되면서 너무나 흔하게 여겨지고, 심지어 여기 저기 땅바닥에 짓밟히고 있는 현실이지만, 사실 복음은 어마어마하게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 그 고귀한 비밀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역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믿음의 라인’ 안쪽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은혜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길이 허락되지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은 놀라운 하늘나라의 비밀을 허락받은 자들로서 복되고 또 복됩니다. 이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기쁨과 구원의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은 모든 것에 감사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3. 돌밭 : 시험과 환란을 만났을 때



본문 말씀에 ‘길 가 밭’ 다음으로 ‘돌밭’이 있습니다. 이 또한 우선 회개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심령은 회개를 했지만 조금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이 사람의 마음에 복음이 들어가기는 들어갑니다.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듣고 받아 들여서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싹이 나온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에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타서 뿌리가 없어 말라 버리고’ 라고 나와 있습니다.

방금 돋아난 싹에 해가 비추인다는 것은 시험과 환란을 뜻합니다. 그가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 들였지만, 실은 회개가 조금 밖에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고, 또 세상 것이 아직 다 정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뿌리가 아직 견고히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막 움터 온 싹이 말라 죽어버리는 모습입니다. 사실 믿음의 삶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시험과 환란은 반드시 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부서지고 부서지지 않으면, 자신의 모난 부분으로 남을 상처 입힐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도 온전히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돌밭’ 은 온전한 회개의 중요성과 함께,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훈련을 받는다는 점과 연결하여 깊이 묵상할 부분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 중 특별히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치고 훈련을 안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40년 동안 제왕 교육을 받았습니다. 무예, 학문, 통솔력 등 최상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저 스스로도 ‘나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는 애굽의 왕자로 자라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리라’는 계시를 지속적으로 받아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날 모세는 학대받는 히브리 동포를 구하려고 애굽인을 죽였습니다. 헌데 이때부터 오히려 일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서 그는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합니다. 어쩌면 이 때 가장 당황한 것은 모세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모세에게 알려주시되 ‘내가 너를 쓸 것이다’ 까지만 말씀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모세는 도망가면서 ‘내 꼴이 이게 뭔가’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땅에서 다시 40 여 년 동안 처가살이를 합니다. 모세의 처 ‘미디안’은 그 이름이 ‘들 당나귀’라는 뜻입니다. 성격이 매우 드센 여자였나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 최강국에서 왕자 교육을 제대로 받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낯선 땅에서 처가살이하며 양 치는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 세월이 무려 40 여 년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기 전까지, 그는 점점 늙어가서 쇠약하고 찌그러진 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요? 한마디로 모세를 40년 동안 훈련을 시키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상적인 왕자 교육이 아니라, 그를 완전히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그를 옥토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부서짐의 훈련을 너무나 받다보니 나중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며 ‘너를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하셨을 때, 오래 전 애굽 왕자로서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니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바로에게 갈 수 있겠느냐’면서 한없이 쪼그라든 대답을 합니다. 그는 객관적으로 볼 때 ‘처가살이 하는 늙은이’였고, 자신도 그 처지를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쓰십니다. 완전히 나의 자아가 없어진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자,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 모세에 비교했을 때 온전한 회개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또 나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리 주님의 귀한 은혜를 받는다고 해도 잠시만 지속될 뿐입니다. 그래서는 환란과 핍박이 찾아왔을 때 곧바로 넘어지고 맙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교인들 중에도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4. 가시 떨기 :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



이 두 가지 밭 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가시 떨기’ 에 씨가 뿌려진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 주님의 은혜와 말씀이 씨로 뿌려졌을 때, 싹이 나고 뿌리도 내립니다. 그런데 자라나다보니 이제는 이 사람 안에 함께 있는 가시덤불이 자라나는 나무의 숨통을 막게 됩니다. 이 가시덤불은 재리의 유혹 및 세상의 염려입니다. 마귀는 환란과 핍박을 주기도 하지만, 이러한 염려를 이용해서도 복음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이 최고이고, 복음을 믿어도 주님은 주님이고 내 삶은 내 삶’ 이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길 가 밭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길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세상하고 반대되는 것이 주님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주님께 속하였다면, 나와 세상은 원수지간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적인 걱정을 하는 것도 주님의 길을 온전히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 걱정을 합니까? 마태복음 6장 33-34절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성도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심지어 내년에 있을 일을 걱정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은 내일 일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내년의 일을 왜 당겨서 걱정 하십니까? 이렇게 걱정을 안개처럼 자욱하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삶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우리가 주님을 전심으로 신뢰하고 깊이 인격적으로 만날 때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뢰의 관계가 주님과 굳건히 형성되는 것 역시 기도하고, 말씀을 실천하며 살면서 내가 성령으로 채워지며 또한 주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실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내려놓을 힘을 갖추고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아니 신앙인들 안에서도 ‘기도만 하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게 없습니다. 기도도 좋지만 세상적인 방법도 취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다들 말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비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으로 볼 때 무기력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몹시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 오직 주님만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는 사람의 영을 열어주어서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주시고, 삶의 모든 시간에 항상 동행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려주실 때마다 마지막에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의 귀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귀를 뜻합니다. 그 귀가 없으면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실로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도 허락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바 깥세상은 이미 사단 권세 아래에서 겹겹이 마귀의 바리케이드가 쳐 있는 상태입니다. 이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은혜의 장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며, 세상에 우연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붙잡아 끌어 주시고, 동행하셔야만 이 자리에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시시 때때로 환란을 일으키고, 세상의 염려를 던져줍니다. 이러한 장애를 모두 이기고 주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것은 우선적으로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를 잡아주시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5. 많은 결실을 맺는 옥토 밭



오늘 본문 비유의 마지막 밭인 ‘좋은 밭’은 내가 완전히 부서지는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데 온갖 환난을 기도와 성령의 힘으로 이겨 나가면서, 마귀가 던져주는 많은 유혹들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어질 만큼 부서진 사람은 이 세상일에는 집착을 하지 않으며, ‘어떻게 하면 주님 일을 더 할 수 있을까?’에만 골몰하는 뜨거운 심령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주님 일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를 통해 자기의 부와 명예, 권력을 취하려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들은 부서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정작 부서진 사람은 설령 계시를 못 받아도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 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항상 선택합니다. ‘주님의 기뻐하심’이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영적인 응답을 직접 못 받는다고 할지라도, 말씀에 비추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따라 살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아! 주님께서 이미 나를 장악하고 계시는구나’를 느끼게 될 날이 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적인 방법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을 아예 가루로 만들고서 당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럴 때야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잘 자라나 열매를 맺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대에 마지막 추수꾼을 찾고 계십니다. 어마 어마하게 귀한 하늘나라를 모르는 채 어둡기만 한 이 시대, 목숨을 내놓고 복음의 본질이 꺼져가는 현실을 알릴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 복음이 재 확장되고, 어떻게 하면 주님과 함께 살며 기뻐하는 영의 사람으로 세상이 가득 찰 수 있겠는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훈련의 시기는 모두가 겪어내기 어렵지만 이로써 내 심령을 갈아엎고, 오직 주님의 씨앗만이 자라나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으시는 밭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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