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홀로 선다는 것은 (빌 4:13)
작성자 달처럼
작성일자 2011-03-15
조회수 4220
 

홀로 선다는 것은 (빌 4:13)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공생이 실생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공생이 홀로 서는 삶, 즉 자립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이것이 은혜를 베푸는 자의 법칙입니다.

밭 모퉁이와 바닥에 떨어진 이삭이 전체 수확량의 몇 퍼센트인지 정확하게 계산한 뒤 전체를 다 거두어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가난한 사람들이 올 때마다 창고에서 꺼내주는 것이 훨씬 위생적이면서도 인간적이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가난한 자의 몫을 그냥 밭에 내버려 두라고 하실까요? 만약 주인이 창고에 거두어들일 경우,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마치 자기 것을 인심 쓰듯 나누어 줄 것이고, 더욱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주려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신 23:24-25)


수혜자는 언제라도 포도원이나 곡식밭에 들어가 배불리 먹을 수 있지만, 그릇에 담거나 낫으로 잘라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수혜자가 한 번에 며칠 혹은 몇 주일분을 가져오게 하시지 않을까요? 그 경우 수혜자에게 거지근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 하나님께서는 타인의 도움으로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립을 위한 배려이지, 일평생 거지로 빌어먹으라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수혜자들이 이것을 착각하지 않도록, 시혜자의 법칙 외에 수혜자의 법칙을 따로 주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의 광야 생활 끝에 요단강을 건너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수 5:10-12)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치는 4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그 정도였다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에 입성하면 하늘에서 매일 진수성찬이 떨어져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에 진을 침과 동시에 만나와 메추라기는 멈추었습니다. 그해엔 가나안 땅에 거두어져 있던 곡식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그 다음해부터는 그들이 직접 땀 흘리고 수고하면서 곡식을 거두어야만 했습니다.

약속의 땅은 일하지 않고 먹는 거지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먹을 것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립의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은 ‘길갈’이었습니다. 길갈이란 ‘굴러가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수치가 종식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지리적으로 길갈에 거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는 자가 됨으로 노예의 수치에서 비로소 벗어났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자립은 하나님의 일관된 요구 사항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립하지 않으면 공생은커녕 누구에겐가 기생할 수밖에 없고, 기생은 공생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립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첫째, 경제적 자립입니다.

경제적 자립 없이는 일평생 누군가에게 얹혀 기생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경제적 자립이란,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신을 맞추어 넣는 능력을 기르고 갖추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자기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절대시하는 자는 반드시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우리 자신을 맞출 줄 아는 경제적 자립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크리스천들이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된 이 구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구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이 무슨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은 경제적으로 풍부하거나 궁핍할 때에도 교만이나 비굴함 없이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신을 적응하는 능력을 길렀습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4장 13절의 배경입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질에 매이면 축적한 물질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물질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반면 어떤 경제적 상황이든 스스로 적응할 수 있는 자는 물질로부터 자유하기에, 그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행위의 자립입니다.

행위의 자립은 남의 손을 빌려 자기 일을 행치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타인에게 떠맡겨서야 누가 그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하는 데에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공중화장실에 들러 보는 것입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깨끗하고 후진국일수록 불결합니다. 국내뿐 아니라 선진국에 있는 한인 업소 화장실은 거의 지저분합니다. 이는 청소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화장실의 주 사용자들, 즉 한인들이 지저분하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의 공중화장실의 불결 상태는 더욱 심각합니다. 그것은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제3세계 근로자들 때문이 아니고 우리 국민들 때문입니다. 공동 목욕탕 역시 쓰레기를 버려야 할 곳에 버리지 않고 심지어 비누와 수건을 가져가지 말라는 문구까지 쓰여있습니다.

싱가폴 쥬롱새공원의 나뭇잎을 보면 한글로 ‘싱가폴 주롱새공원에 ○○○ 다녀가다.’는 낙서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스위스 알프스 산 몽블랑 바위에도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새겨놓고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애국이 아닙니다.  쓰레기 처리 문제 역시 행위의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깨끗한 환경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가져가고 일반 봉투에 남의 쓰레기를 뒤바꿔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매년 추석 연휴에 속초의 바닷가를 여행가면 여름휴가 때 버린 쓰레기가 아직도 남아 있고 모래 속에서 묻어놓은 쓰레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국내뿐 아니라 태국의 파타야 휴양지에도 한국 라면 봉지가 물위에 떠다닌다고 합니다. 명동의 가로등 기둥에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며, 대부분 종이컵과 음식물 포장지로 젊은이들이 먹거나 마신 뒤 버린 것들입니다.


서구 사회가 더불어 깨끗한 도시, 청결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 이유는 그 나라의 청소부들 숫자가 우리보다 많거나 근무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쓰레기를 반드시 버려야 할 곳에 버리는 자립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행위의 자립을 이룬 사람만이 타인의 인권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주부가 집안 일이 많아서 도우미의 도움을 받을 경우, 이 주부가 행위의 미자립인이라면 그는 도우미를 돈으로 사는 대상으로 여길 것이고, 행위의 자립을 이룬 주부라면 그에게 도우미는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동역자인 도우미를 자신처럼 존중하며 더불어 살게 됩니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의 자립을 이루지 못한 상사는 아랫사람을 도구 이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행위의 자립인만 함께 일하는 자를 인생 동역자로 섬길 것이요, 그로 인해 주위의 사람들은 공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행위의 자립 없이는 주님과의 동거도 어렵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믿음은 깨달음, 신뢰, 행함의 순서로 전개되고 심화됩니다. 바른 믿음이라면 어떤 모양으로든 행동의 변화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고, 행함과 무관한 믿음이란 믿음일 수 없습니다.


셋째, 의식의 자립입니다.

매년 우리는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회식 때 체면 때문에 술을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다 목숨을 잃는 뉴스를 접합니다. 자동차 크기나 아파트 평수.

가짜 명품이라도 몸에 걸치고 다녀야 하는 한국인의 성향 역시 의식의 미자립에서 기인합니다. 그릇된 결혼 문화로 인하여 자녀 결혼식 때 되돌려 받아야 할 축의금 때문에 속이 상해도 교회를 옮기지 못하는 사례나 지나친 예물과 예단으로 다투는 경우 역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영적인 자립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자기 고유의 목회 철학을 지니지 못한 채 ‘성장 목회’, ‘치유 목회’, ‘셀목회’, ‘멘토링’ 등의 목회 유행을 쫓아다니기 바쁘고 교인은 교인들대로 지기 인생의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지 못해 남에게 일일이 의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누구에게도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 무슨 질문이 있으며 누구의 조언이 필요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1-4)


아브람이 받은 첫 번째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복이었습니다.

1600년대의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를 부르심>이란 성화는 이런 내용입니다. 마태는 본래 세리였습니다. 세관에 세리들이 주욱 앉아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곁에는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초라한 베드로의 옷차림을 보면 가난한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리들은 예수님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단 한 사람, 마태만이 초라한 몰골의 예수님임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서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주님께서 마태 한 사람에게만 다가가서 귓속말로 “나를 따라올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개적으로 선포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듣는다고 해서 다 따라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 본문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창 12:4)”라고 증언합니다.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간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좇아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수차례에 걸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귀가 없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자립인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말세를 다루고 있는 요한계시록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는 구절이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모든 가치관이 뒤흔들리는 말세에는, 영적 자립 없이는, 타인과의 공생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 하나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듣는 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바뀌고, 우리로 인해 세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첨부파일
카테고리 서모세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