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치유하시는 하나님 (왕하 5:10-14)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2-07
조회수 4190



치유하시는 하나님 (왕하 5:10-14)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 .여호와 라파





출애굽기 15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라파’, 치유하시는 하나님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또 ‘여호와 이레’의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승리 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여러 가지 행적을 통하여 드러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치유하시는 하나님’과 그 은혜를 받기 위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당시 아람 왕의 군대 장관으로 전쟁을 나갈 때마다 승승장구하던 대장군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오늘 본문에 앞서 5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기게 하셨다고 나옵니다.

(왕하 5: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즉 그는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그를 선택하셨기에 전쟁마다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시기가 다르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즉 나아만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사람도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께 부름 받는 시기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잘못된 길을 한참 가고 있는데도 주님께서 일부러 내버려 두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영성원에 이른바 ‘법당을 모셨다’던 분이 와서, 은혜를 받자마자 주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한 사람을 구원하심으로써, 그가 걸었던 잘못된 길을 걷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다름 아닌 바로 이 사람을 도구로 써서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어머니 뱃속 전부터, 또 창세부터 정하시어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불러 은혜 받게 하시고, 또 영적인 군사 용사로 훈련받게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치유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우리는 복음이 널리 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하나의 ‘종교적인 가르침’ 정도로 받아들일 뿐, 복음을 원의미를 깨닫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병이 나면 가장 일차적으로 병원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복음 말씀을 보면 그 면면에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 이신 것이 나타납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쳐서 그렇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도들도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과 같은 일을 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복잡하고 이론적인 신학 지식은 비록 몰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 영이 정확히 알고. 삶에서 그분의 은혜를 받고 인격적으로 만나가며, 모든 곳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복음입니다.






2.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임





오늘 본문에서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나아만 장군은 전쟁에서는 백전백승의 명장이지만, 그 속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몸 안에 문둥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나아만장군의 모습은 어찌 보면 우리 현대인의 영적인 자화상과 비슷합니다. 겉으로는 모두들 신사 숙녀로 잘 차려입고 아주 예의를 차리고 인간관계를 이루어가지만, 한 사람 한사람 뜯어보면 어쩌면 그렇게 속으로는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삶에 짓눌려 있음은 물론이고, 영혼의 기쁨 역시 조금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도 간절히 낫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그 동안 어떤 갖은 방법을 써도 회복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몸종이 하나 말하길, ‘이스라엘에 가면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만나면 치유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 여러분!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이 나아만 장군처럼 먼저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만약 복음을 ‘그건 옛날 이야기이고, 그때 그 사건이다’ 로 받아들인다면, 구약은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국한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 ‘레마’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능력과 권세가 실제로 나타납니다.

나아만 에게는 이 하녀의 이야기가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 이 었습니다. 분명히 하녀는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논변으로 그를 설득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고, ‘그가 하나님의 능을 받아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한다’고 전했습니다. 이때 나아만은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저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할 복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만약에 그가 하녀의 말을 무시했다면, 그의 평생은 문둥병자로 죽는 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그는 ‘그래, 만약에 그런 사람이 이스라엘에 있다면 내가 직접 가서 고침을 받아야겠다’ 결심을 하고는 자기 나라의 왕에게 고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주 별 볼 일 없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나라에 가서 병고침을 받겠다는 나아만 장군의 청은 아람 왕 쪽에서도 곤란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대국의 장수가 작은 나라에 가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치유 기도를 받겠다고 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왕은 이것을 허락했고, 나아만은 이스라엘로 떠날 때 대단한 준비를 했습니다.

5장 5절에 보면,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를 준비했다고 나오는데, 은 10 달란트는 지금으로 환산하면 453 킬로그램이고, 금 6천 세겔은 성인 한 사람의 남자 무게만큼 됩니다. 여기에 옷 열별을 더 예물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약소국 이스라엘 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러 갈 채비를 한 것입니다.

헌데 나아만이 이스라엘에 도착해서 아람왕이 쓴 편지와 자기가 온 목적을 이야기하자, 정작 이스라엘 왕은 너무나도 깜짝 놀랍니다. 옷을 찢으며 ‘어떻게 나에게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하느냐? 정녕 우리나라와 전쟁을 하고자 이런 일을 꾸민 것이 아니냐?’며 대경실색을 합니다. 헌데 이 상황이 모두 엘리사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곧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사건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3. 은혜를 청하는 자의 겸손 된 무릎 꿇음





자, 이제 말과 병거를 거느리고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행이 왔는데 엘리사는 그를 만나 주지도 않고 몸종만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전하길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몸이 깨끗해지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몹시 화를 냅니다. 그는 엘리사가 친히 나와서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에게 손을 얹고 고쳐줄 줄 기대했는데, 엘리사가 자기를 만나주기는 커녕 종만 내보는 것이 아닙니까? 대국의 장군 나아만은 아주 짓밟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으러 하나님의 대전에 나아 올 때는 세상의 대통령이든 대왕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뻣뻣하게 세운 굳은 목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고 주님 ‘자비의 얼굴’을 청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 런데 이 상황에서 아주 체면을 구겨버린 나아만은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강이 없더냐?’ 하고 분노하여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때, 나아만의 부관이 간곡히 말렸습니다. ‘만약 선지자가 더 어려운 걸 시켜도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그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십시오’. 이 부관의 말에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따르기로 마음을 돌립니다. 


나 아만은 요단강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조금도 낫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 들어가서 씻으라고 했으니, 한번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조금씩 차도가 보이면 신이 나서 몸을 씻을 텐데, 한번 들어갔다 나와도 두 번 들어갔다 나와도 문둥병은 그대로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그 앞으로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바로 우리의 청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응답을 해주시기보다 이를 통해 더 큰 것을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여리고성을 함락시키실 때도 엿새 동안 성 주변을 돌 때는 아무 일도 없더니, 일곱째 날에 크게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일곱 번 몸을 씻은 것이나, 여리고성이 일곱째 날에 무너졌을 때의 ‘일곱’은 완전수를 뜻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나올 때는 성부-성자-성령의 3과 동서남북 방위의 4를 합한 것으로 ‘완전수’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이 들린 여자’에게서 마귀를 쫓아주셨을 때 마귀가 실제로 일곱 마리라는 뜻이 아니라 아주 종류별로 ‘완벽하게’ 들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제 나아만이 드디어 일곱 번 째 몸을 씻고 나오는 바로 그 순간에 주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가 몸을 씻을 때의 상황을 조금만 상상해본다면, 그는 정말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밤중에 혼자 몰래 씻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을 때 물에 들어갔는데, 여섯 번째까지도 몸은 그대로였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네가 정말 내 앞에 온전하게 무릎을 꿇느냐’를 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어린아이의 살처럼 완벽히 회복되었습니다.



나아만은 너무나 기뻐서 준비해온 예물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그때 엘리사는 그 예물들을 하나도 받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열 문둥병 환자를 고치셨을 때, ‘너희는 제사장에게 예물을 바치고, 너희가 온전해졌음을 입증 받아라’고 하셨습니다. 즉 은혜를 받고 예물을 바치는 건 옳습니다. 그런데 왜 이때 엘리사는 예물을 받지 않았을까요? 바로 나아만을 통해 이방인의 땅에 하나님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아무리 사정을 해도 엘리사가 예물을 받지 않자, 그는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그는 개종을 한 것입니다. 비록 고국에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만, 자신만은 앞으로 ‘천하에 하나님 밖에 없는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열왕기 하권 나아만 장군의 고침 받음 사건에서 치유하시는 하나님과 그 은혜를 받는 법칙을 잘 깨달으셨길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정성껏 바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내리십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아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을 당시, 고향 나사렛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두고 이리저리 말이 많았고, 그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풍성히 내려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나만 장군에게서 보듯, 은혜를 받는 사람은 겸손과 순종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2장 24절이사야서 53장의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이었고,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았다고 기록된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병마를 비롯해 삶의 모든 저주를 이미 예수님께서 지셨습니다. 그 까닭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저주 속에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순종과 겸손으로,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때, 주님께서 인자한 얼굴을 돌리실 때, 그분은 나를 치유하시고 영원한 구원을 베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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