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수직적인 아가페 사랑 (요 13:34-35)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2-04
조회수 3276



수직적인 아가페 사랑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 마음판에 써 주신 법





우리는 모두 주님을 제대로 섬기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섬기는 것이 주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일까요?

먼저 주님을 영으로 만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율법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5장 4절 말씀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을 만난 후에는 율법이 결코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 졌습니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은 613개의 율법을 하나도 빠짐 없이 지켜야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분은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으니, 이 새 계명이 곧 오늘 본문 말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 와 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의 형식에만 얽매어 있고,  그 형식을 바른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은혜의 사랑에서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요컨대 율법은 하나의 모델로 봐야 합니다.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 즉 주님의 의가 나타나기 전에 하나의 표상으로서 우리에게 만들어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고린도 후서 3장 3장을 봅시다 :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이 성경 말씀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돌판에 새겨주신 십계명과 이제 우리 각자의 마음판에 당신의 영으로 새겨주신 법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직접 가슴에 성령을 받게 됨은 참으로 신비 중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0장 16절 말씀을 함께 본다면, 지금 이 시대 우리가 과연 어디까지 형식을 좇아야 할 것이냐 라는 혼란이 좀 가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우리 마음에 각인하셨으며, 성령님께서는 우리 가슴에서부터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에스겔 36장 26-27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당신의 마음을 집어넣어 주셨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로마서 8장 14절에서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 하셨으니, 바꾸어 말하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시대 교회에도 과거 ‘율법주의’와 비슷한 모습들이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 ‘찬양은 이렇게 해야 한다. 십자가는 이렇게 해야 한다’ 등 교회 안의 세부적인 규정들만을 따지는 모습들이 그것입니다. 수많은 형식들이 있지만, 이들이 신앙생활에 본질은 아닙니다. 그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였는지를 새겨봅시다 :

(고전 9:20-22)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왜냐하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이 가슴에 새겨져서 그 인도를 받고 사는 사람은 율법에 매인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의 법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13장 8절에서도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십계명만 봐도 쉽게 이해가 됩니다.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사랑하면 부모 공경이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도 ‘해라, 하지 말라’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어찌 살인을 저지를 수 있겠나, 사람을 미워하니까 살인도 저지르는 것이지 사랑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겠나?’ 하는 차원에서 볼 일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데 어찌 남의 것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율법적으로 ‘이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아직 어린 신앙에서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기준으로 보면, 거기에 무슨 한계가 있겠습니까?





2. 주님의 사랑은 수직적인 사랑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인 '사랑'은 한마디로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식을 많이 사랑한다고 손해를 본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자녀에게 계속 못 해줘서 안타깝기 그지 없기 마련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랑의 관계, 사랑의 법으로 들어가자고 하시는 겁니다.

율법은 연약한 인간이 다 지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 다시 말해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시기 전의 사안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는 신앙의 본질 보다 율법이 앞서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 말씀은 ‘아니 그러면 주일도 십자가도 필요 없다는 말이냐?’라고 자칫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저는 오늘 설교에서 가장 본질적인 ‘사랑의 법’에 집중 조명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주님과 내가 인격적으로 깊은 사랑관계를 이루면서 살고 있는데, 결국 형식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율법은 주님을 진짜 영으로 만나기 전에, ‘큰 틀’을 제시해주기 위하여 소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우선 요한복음 14장 23절 말씀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 사이에 흔히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사랑이 아니라, 마치 폭포수가 위에서 떨어지듯 ‘수직적인, 한도 끝도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사랑을 하길 원하십니다.

사 랑은 하면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태 이 사랑을 깨닫지도, 이 사랑의 법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만큼 존귀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주님께서 우리 인간 하나 하나의 ‘잘나고 못남’을 하나도 따지지 않으신 채, 사실 모두 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할 우리를 당신의 목숨을 값으로 치루고 살리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우리나라 전래 이야기가 하나 있지요. 형님과 아우가 밤에 볏단을 지고 가다가 서로 마주친 이야기 말입니다. 추수가 끝난 후에 형님 생각에는 아우네 양식이 모자랄 것 같아서 밤에 몰래 자기 볏단을 놓고 갔고, 아우는 아우대로 형님네가 아무래도 애들도 장성해서 양식이 부족할 거라는 생각에 자기 몫의 볏단을 형님네 집에 놓고 왔는데, 며칠을 그렇게 서로 몰래 볏단을 옮기던 와중에 달 아래 둘이 마주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또 이들이 주님을 몰랐다 할 지라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입니까.

주님의 사랑은 한없이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의 여러 가지 종류 중에 가장 높은 단계의 ‘아가페’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이는 나 자신에게 어떠한 손해와 고통이 오더라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사랑도 이러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에게 돌로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서도 스데반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행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3. 사랑의 계명을 따라 살면





십자가가 있는 장소이건 없는 장소이건 ‘십자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배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임재 현상은 구약 시대로 보자면 제사를 지낸 후 주님의 불이 내려와 제물을 완전히 불사르는 사건과 같습니다. 이미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면, 예배당 건물만이 아니라 내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건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백성, 신부, 자녀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사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것 모두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행하면서도 만약 정작 중요한 사랑이 나에게 없다면, 이는 형식만을 붙잡고 있는 것 밖에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지켰냐 많이 지켰냐를 따지지 말고, 더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빚어지는 사랑의 행위가 나의 열매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전심을 다해 사랑하며 그분께 순종할 때, 그러할 때 응답이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앞에 나타나셨지요. 베드로는 주님을 3번이나 처참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아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겁니다. 체면이 말이 아닐뿐더러, 주님 앞에 너무도 부끄러워서 다시금 ‘주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라는 말 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 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자기 자신이 밉고도 미웠을 겁니다. 그래서 ‘그냥 다시 고기나 잡자’하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허전하기 이를 데 없고, 고기도 안 잡혔습니다.

헌 데 아침에 동이 터 올 때 저 쪽에서 ‘어이~’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겠지요. 요한이 먼저 ‘주님이시다’하고 알아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정말 기가 막혔을 겁니다. 주님을 찾아가서 만나고는 싶은데, 용기는 없는 와중에 주님께서 직접 여기에 오셨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옷을 입은 채 첨벙첨벙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옷에서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주님 앞에 송구하게 서 있는데, 주님이 이제 그에게 물어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을 때, 우리말로는 다 ‘사랑’으로 번역되지만, 사실 앞의 두 번은 ‘네가 나를 아가페-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주님, 제가 필레오-사랑, 즉 친구 간의 우정적인 사랑을 합니다’고 두 번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주님 제가 친구로 우정도 못 지켰지요’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결국 세 번째로 ‘그러면 네가 나를 필레오-사랑 하느냐?’고 물어보셨던 겁니다. 그리고 세 번 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셨지요.



우리 역시 베드로와 비슷한 때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신앙 생활이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짓밟히고, 속상한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거라’고 하십니다. 저만 주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각자가 주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이나 밖이나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어둠 속에 있는 주님의 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양을 칩니다. 형식과 요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음에 넣어주신 ‘사랑의 계명’에 따라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삽니다. 글을 몰라도, 신학을 몰라도 주님을 초청하고 환영하기만 한다면 이 분의 계시를 받아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의 길을 올바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어렵게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세상이 그 길을 어렵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쉽게 설명하셨는지를 느끼실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진리에는 여전히 어둡기 때문에, 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으로 중언부언을 하는 것이 아닌지요. 무엇보다도 말씀을 주님의 영으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면 이 안에서 우리를 이끄시며 아주 명쾌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은 수직적이고 하면 할수록 아름다워집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며 주고 또 줄 때,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내 자신이 사랑의 화신이 되고 내 영이 장성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닮아 수직적인 사랑을 행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성령님을 초청하여 이 분과 함께 주님의 사랑을 이루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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