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 (요 4:1-14)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1-23
조회수 3203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 (요 4:1-14)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 영적인 진리와 믿음의 눈



어떤 학자 하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세계 곳곳의 수많은 종교를 막론하고 2만여 명의 사람들의 임사 체험을 인터뷰했는데, 이들에게서 보이는 큰 공통점이 두 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먼저 사람이 죽는 순간 자기 영혼이 몸에서 나오는 현상, 즉 유체이탈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으며, 이어서 자신의 시신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한다든지 장례 준비를 한다든지 하는 장면을 본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빛이나 어둠에 깊이 빨려 들어가는데, 그 순간부터 마치 영화 필름이 아주 빨리 가는 듯한 장면으로 자신이 어려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걸어온 길을 모두 보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때 사람은 누구나 몹시 애통해 하면서, 삶에서 자신이 저지른 무수한 선택과 잘못들을 느끼고 깨닫는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신앙’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눈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보자면 아주 허무맹랑하고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모두 믿어질 것이라고 제가 자주 말씀 드립니다만, 히브리서 기자 역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천지창조가 믿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사는 작은 지구, 그 우주 전체에서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지구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게다가 우리가 사는 지구는 공중에 붕 떠있는데, 이 안에서 산천초목이 자라고 사람이 산다는 게 또 얼마나 신비 중의 신비인지요.

세상의 많은 이들이 흔히 말하길, “나에게 예수님과 천국을 보여주면 그때 내가 믿겠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시죠? “네가 우선 믿어라, 그러면 볼 수 있느니라”고 정반대로 말씀 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영접해야만 이분의 영이 내게 오셔서, 지금까지 죽어있던 나의 영을 살려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대 이집트 미라’ 아시죠? 한번은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한 피라미드에서 미라를 발견하고는 그 움켜쥔 손을 펴보니 식물의 씨가 나오더랍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과연 이 3천 년 전의 씨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의논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뭐 복잡할 거 있냐. 한번 심어보자. 심어서 싹이 나오면 좋을 테고, 아니면 그만이지 않냐”고 해서 씨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씨앗들 중 70퍼센트가 살아서 결국 꽃을 피워냈다고 합니다. 이 식물이 바로 여러분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다알리아’입니다. 그 이름은 식물 재배에 관여한 ‘다알’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땄지요.

 

이 예화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많습니다. 3천년 된 씨앗이지만 이 안에 이미 생명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햇빛을 비추고 물을 주고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자 싹이 난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아담의 후예’이기에 창세기 때 저지른 범죄로 인하여 '영적인 차원' 에서 보자면, 이미 모두 죽어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의 빛과 물이 우리 안에 공급되자 우리가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그분에게서 놀라운 인도함을 받아나가는 영적인 여정을 비로소 걷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성경 말씀이나 사사,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타났지만 이제 신약에서는 당신이 직접 육신을 통해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구현된 까닭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참생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신 예수님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에 대한 복음’을 직접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 지식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북이스라엘이 아수르의 침략을 받은 후 이방인과의 통혼을 했다고 하여,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이 아주 혐오하던 곳이었습니다. 순수 혈통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유대는 대제사장의 나라이며 하나님께 특별히 부름 받은 나라이므로 다른 민족과 피가 섞여서는 안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는 편이 훨씬 빠른 길이었지만, 유대인들은 그 더러운 지역에 발도 붙이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의례히 요단강을 따라 먼 길을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이해됩니다. 즉 예수님은 고의로 유대인들이 혐오하던 이 지역을 지나가셨던 겁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이 여인을 통해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계시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내려간 상황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이 벌어진 이 우물이라는 곳도 우리나라의 시골 우물과는 또 다릅니다. 가나안은 물이 매우 귀한 땅입니다. 게다가 우물은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적어도 1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게 보통이었으며, 양에게 물을 먹이거나 사람들이 마실 물을 위해 일부러 멀리까지 나와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실제로 가보면 너무나 척박해서 마치 저주받은 땅이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물론 ‘젖과 꿀’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지만, 아무튼 이곳은 너무나도 메마른 땅인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의 말씀에서 ‘생명수’라든가 ‘시냇가에 심긴 나무’ 같은 구절 역시 우리 식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놀라운 생명력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더 깊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제 바로 이런 배경지식을 안고 예수님께서 여인을 기다린 장면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여인은 한낮 오침 시간에 우물가에 왔다고 합니다. 중동 지방의 한낮은 너무 더워서 아무도 물을 길러 나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에 이 여인이 물을 길러 나온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여인은 혹시 대인기피증에 걸려있는 여인이 아니었을까요? 자기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험담하는 것은 싫지만, 물을 길러 오지 않을 수는 없고, 그래서 남들 다 낮잠 자는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온 것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에 관하여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셨기에 일부러 이 우물가에 앉아서 여인이 오기를 먼저 기다리셨습니다.



3. 영적인 길로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



자 여러분! 사마리아 여인을 먼저 기다리고 계셨던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도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는 모르지만 우주를 지으신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작은 집 하나를 지을 때도 설계도 작업부터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늘나라를 이루고, 주님의 사업을 위한 한 사건을 만들어나가는 일에 주님께서 설계도를 가지고 계신 건 당연합니다. 이를테면 주님은 모든 사람과 때를 조율하시며 ‘이 사람이 오면 내가 이 일을 해야겠구나’하며 하나하나 계획하시고 그 계획대로 이루어가십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자세히 봅시다. 마침 이 여인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선 이 여인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접근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편하게 ‘물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지막 카드로 남겨두시고, 하늘나라 복음에 이 여인을 굴복시킬 길을 찾고 계셨습니다.

우리 역시 상대방이 스스로 복음에 대해 굴복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으로는 그를 도저히 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누구나 자아로 가득 차 있고, 또 자신이 깨지기 전에는 일단 ‘내가 가장 옳다‘는 관점에서 살게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이 여인은 마을에서 가장 추악하고 불결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액면대로 보자면 그녀는 남편을 다섯 번 갈아치운 여자이기에 평판이 좋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이 '대체 왜 그렇게 남편을 바꾸었을까'에 관하여 묵상해보면 또 다른 깨달음이 옵니다. 아마 이 여인은 충족되지 않는 영적인 공허가 있지 않았을까요? '이 사람을 만나면 내가 좀 더 나을까, 저 사람을 만나면 좀 더 나을까' 하면서 자신의 희망을 남편에게서 찾고 싶어 했던 여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육적인 것들은 아무리 채우려고 해봐야 본래부터 채워지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본래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서 좋다는 모든 것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만족이 안 되게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자기 행복을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다 좌절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하고 상대하기도 싫고,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나 자신도 미웠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애초에 거룩한 사람을 골라 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사람을 택하여 쓰십니다. 그리고 그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도 이 본문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그 대화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시고 눈 여겨 보십시오.

예수님은 조용히 이야기하십니다. “나에게 물 좀 주시오.” 그러자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당연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의 땅 조차도 밟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이 유대인이 말을 걸고 물까지 달라고 하니 놀랐던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관심을 서서히 영적인 곳으로 돌립니다.

 

10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시자, 여인은 다시 육적인 차원에서 질문을 합니다. 대화는 주님께서 영적인 차원에서 말씀 하시면, 이 여인은 육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 인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영적으로 이끌어주시는데,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서 이 여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물론 이 역시 육적인 차원에서, 실제로 그런 신기한 물이 있는 줄로만 알고 반신반의 하면서 ‘그 물 좀 주십시오’하고 청했겠지요.

그때서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원래 카드를 꺼내어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 알고 계셨지만 처음부터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이 여인이 부끄러워할까봐 여인의 마음을 서서히 영적인 곳으로 이끌어내시면서 말씀을 하신 겁니다.



4. 영적 사역의 중요성



본문 구절에 이어지는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 이야기는, 신앙생활에서 영적인 사역의 필요성에 대한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지식의 은사’를 받으면,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해 사전 지식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계시를 받는 것은 무기를 공급받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나 나나 다른 게 무엇이냐?’라고 얼마든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 시대에 그들의 사역은 ‘자! 네가 갖지 못한 것이 나에게는 있다. 나는 주님의 권능으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한다’ 고 실제로 영적인 권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주님 사역에 있어서 ‘계시적 측면’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의 차원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합리적인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무당집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무당이 귀신의 힘을 빌려 와 과거와 현재를 알아맞히는 것이 사람들 눈에는 신비하고 옳게 보여서 자꾸 이끌리는 겁니다.

허나 무당의 영업은 하나님의 것을 모방해서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지 그들은 절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점치러 오는 사람들 스스로 ‘그래, 과거와 현재를 딱 맞추었는데 미래도 맞겠지’하고 유추하는 것에 불과하며, 또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무당은 부적을 쓰라는 둥 굿을 하라는 둥 하면서 사람을 점점 악한 영에 묶이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영적 지식의 사역인 겁니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을 때, 여인이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맘이 참되도다”(18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개인’의 삶을 조명하여 관심을 가지신다는 걸 알자, 그제야 이 여인은 진정으로 감동하여 예수님을 따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대화는 서서히 영적인 차원, 예배로 옮겨 갑니다. 당시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1번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냥 자기 집에서 제사를 올릴 수 없었으며 반드시 예루살렘에 제사장을 통해야만 그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못 오게 하니까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그들은 창세기에서 모세가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산을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이 아니라) ‘그리심 산’으로 믿고 여기서 제사를 올려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오는데, 그 때에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아무데서나 무릎을 꿇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5. 생명수를 마셔라



자,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다고 하셨던, 즉 우리에게 오늘날도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영생의 생수'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설교 앞에서도 잠시 말씀 드렸듯, 우리의 신앙이란 본래 메마르고 죽고 좌절되었던 내 영혼이 예수님의 생수를 받아 소생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 살아나게 되면 삶에 실질적인 변화가 어마어마하게 일어납니다. 제대로 가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내 삶에 개벽이라 할 만큼 근본적인 변화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신앙생활은 언제부턴가 ‘일반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생활의 차원에 머물고만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삶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엄청나게 일어나는 것이 정상인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도 납득될 만한 신앙생활을 고수하고자 합니다.

 

죽을 영혼이 살 영혼으로 바뀌고, 세상만을 바라보던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달려가면서 희생적이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또 나의 가치관이 세상적 부와 명예, 권력으로부터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는 삶이 과연 천국적인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진짜 신앙생활 안에 들어온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바뀌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그 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처럼 예수님이 공급해 주시는 생명수에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영이 열려 하늘나라와 영계가 보이기 시작해야 비로소 세상 것을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고, 또 넘어지고 하는 것은 교회가 영적인 꼴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체인데도 불구하고, 그 실체를 보여줄 능력이 없는 교회가 무조건 ‘믿음’만을 강조하는 현실 안에서 양들이 옳바른 길을 인도 받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초대 교회 사도들의 사역은 능력은 실체이지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기 때문에 ‘보고 체험하면서’ 믿음의 세계로 실질적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사건, 바다가 잠잠해지는 사건, 죽어서 이미 썩어가던 나사로가 소생하는 사건, 구약에서는 홍해가 갈라지고, 기드온 골짜기에 태양이 멈추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이 모든 사건을 직접 보고 겪으면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헌데 이 시대의 교회는 그러한 사역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면서도, ‘기적은 예수님과 초대 교회 당시에 필요해서 한시적으로 일어났다’는 식으로 해석하며, 지금은 ‘말씀 최고다’ 하면서 말씀으로 말씀을 폐하는 결과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대로 성장하는 신앙인으로 커나가는 과정 안에서 에베소서 1장 17-19절 말씀처럼, 가장 먼저 계시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 입니다 :

(엡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로써 우리가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둘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계시를 받지 못한다면 믿음이 여전히 온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제가 씨앗 이야기를 해 드렸지요? 그 씨가 안에 내재한 생명력을 받아 싹이 올라오듯이 우리의 영적 삶도 예수님의 생명력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수는 육적인 물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수입니다. 헌데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영혼의 생명수를 모르는 채 부, 명예, 성공, 권력 등등 세상의 온갖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로 영혼이 채워지면 갈급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은 아무리 마셔도 끝없이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진짜 생명수를 마시고 그 맛을 알 때, 다른 모든 세상적 욕망들을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먼저 생명수를 맛보고, 그로 인해 내가 소생함을 체험한 후 남들에게도 이 생명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도 아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예수 믿으면 좋대요. 나중에 천국도 간대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증인이 아닙니다. 영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저항까지도 질서정연하게 반박할 줄도 아는 신앙적 지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사람들이 신앙을 그들의 잣대로 판단할 때, 나 역시 그들을 설복시키고 증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병기는 마귀의 강력한 진을 파괴하는 영적 무기라고 바울사도는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방식조차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옳다고 믿게끔 합니다. 또 세상은 사실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믿는 이들이 주일 성수만 지키고, 조금 더 발전하면 수요 예배에 나오는 것으로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하게끔 이끄는 것입니다. 마치 보험 들듯이 ‘아 정말 죽어서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어쩌나?’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적당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런 신앙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진짜 생명수를 주시며, 이분으로부터 생명수를 공급받지 않으면 내 영혼은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예수님을 인생의 참 주인으로 섬기고 살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내 모든 가치관과 생활 하나 하나가 바뀌어 나갑니다. 나의 어디든 누르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옵니다.

내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가치관을 찾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믿으면 좋대요’하면서 신앙생활을 마치 남이야기 하듯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 신앙에 나의 모든 삶을 투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소위 ‘팔자’라는 것이 좍좍 펴지고, 진짜 영원한 복을 받음을 전심으로 깨닫고 알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걸 꼭 차지하고 붙잡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신앙생활이 진짜입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생에서 겪는 잠시 동안의 고생도 그때그때 너무나 힘든데, 영원한 고통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에, 사람은 반드시 죽고 사후에는 반드시심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은 모릅니다. 현 시대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아예 노코멘트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당도 악령으로 가득차야 작두를 탑니다. 물리적으로 시퍼런 날에 사람 무게가 실리면 바로 죽는 게 정상이니, 그들도 소위 귀신 충만해야 작두를 탑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세상에 귀신의 존재가 너무나 명확하고, 간단히 따져보기만 해도 귀신이 있다면 창조주와 성령님도 계신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악한 영들은 무당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그렇게나 많이 드러내며 그 악한 영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창조주의 영을 받아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당할 이 시대의 성도들은 이러한 영적 권능을 다 잃어버리고 ‘신학적 지식’에만 매달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는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고, 나에게는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를 깨닫길 원합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신앙인은 많습니다.그러나 실상 마귀와 영적인 전쟁을 하고 그 증인이 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승천 전에 ‘마지막 때에 믿음이 있는 자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육적인 필요만을 충족시키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영원한 생명도 주셨고 모든 물질계를 만드셨기에, 이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바뀌어 나갈 때 우리 역시 물질계를 다스리고, 또 날마다 승리하고, 꾸어주는 사람으로 바뀌어나가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물질계와 영계를 함께 다스리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풍랑이 잠잠해진 것은 그분께서 물질계를 다스리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들은 영계에 대한 그 분의 권한을 보여줍니다. 병마 역시 이러한 차원, 물질계와 영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알리아 씨앗을 발견했지만 ‘죽었으리라’ 단정하고 심지 않았다면, 그 씨앗은 싹을 틔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수님의 생명수만 공급시키면 그 모든 것이 놀랍게 바뀌어 우리 삶에 잎도 나오고, 꽃도 나와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6. 예수님의 향기



오늘 이 시간에는 별 볼일 없고 남편을 수없이 갈아치운 여인, 어찌보면 참으로 황당하게 생활하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생명수를 받고 어떻게 변했나를 함께 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폐증이었던 여인이 물동이를 집어던지고, 마을로 달려가서 ‘여기 선지자가 계시다. 와서 보라’고 소리 쳤습니다. 그리고 온 마을 사람 역시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하신 것을 시작으로 사마리아 땅을 구원하셨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주님의 생명수를 실제로 받지 못하면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원하던 것을 고스란히 똑같이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썩어 없어질 세상의 물을 지금까지 늘 마셔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채워봐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데도 ‘더 갖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의 만나’, 천국에서 공급되는 생명수를 마시고 이제부터는 하늘나라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모든 소망을 걸라고 하십니다.

또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세상에 대해 죽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 분을 내 안에 오시라고 초청하고 내 몸이 성전이고 이곳에 깃드실 주님을 내 스스로 예비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시고 싶어도 내가 그 분을 모시기에 합당치 못한 상태기에 때문에 주님은 못 오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희생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나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피 흘리고 수고하고 희생함이 없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결국 ‘종교 친목계’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풍겨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하신 일을 나도 똑같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주님 일을 하고 싶어서 아주 몸살이 나고, 세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 일을 위해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지금으로 치면 미국과 같은 가장 부유하고 큰 이집트의 왕자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그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는가를 각자 봅시다. 못 버려서 아까운 것이고, 못 버려서 하늘나라가 아직 내 삶에 충만히 임하지 못하는 것이고, 결국 못 버려서 내가 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십자가가 그렇게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교회는 세상에 내놓을 것이 정작 별로 없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십니다. ‘네가 나의 신부라면, 내가 간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길 바란다. 내가 갔고 또 사도들이 간 길을 너도 따라 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정답이지, 현재 제도에 정답을 맞추어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말씀 속에서 훤히 드러난 길,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가 고스란히 따라갈 때 우리는 주님을 영으로 만나고, 주님께서는 나를 직접 인도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육적인 갈망을 주님께 모두 내려놓고 “주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인도해주세요. 제가 영으로 이제 새 생명을 받길 원합니다. 주님의 참 생명수를 부어주소서. 죽은 이 영혼이 다시 소생해서 아버지를 보고, 영혼을 보고, 영계와 마귀를 보고, 참된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시길 소망합니다.

그 리고 육적인 나를 날마다 죽일 때, 주님의 영이 나를 사로잡아서 내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저 자신도 깨달아 갈 수록 점점 더 어렵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 어디 쉽습니까? 저도 제가 다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나 답은 찾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길을 같이 가자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주님이 행하신 그 일을 나도 행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를 장악할 수 있게 내가 힘껏 노력할 때, 주님께서는 나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 땅의 꺼져가는 성령의 불빛을 회복시키실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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