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죽었던 영이 깨어나는 신앙생활 (고전 2:1-5)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1-13
조회수 3889


죽었던 영이 깨어나는 신앙생활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1. 영이 깨어나는 신앙생활



우리의 신앙은 영이신 주님을 만나서 나의 영이 깨어나지 못하면 본질적으로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자면 몇 십 년 동안 기도 생활을 성실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강하게 경험하지 못한 성도들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이미 눈으로 보고 또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보시기도 했듯이, 우리 영성원에서 몇 번 은혜를 받으면 그토록 사모하던 성령님의 불과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악한 영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많은 어둠들이 성령님으로 인하여 드러나는 현상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 이러한 영의 세계에 관한 지식을 많이 적어놓았는데, 오늘 본문 말씀도 우리의 신앙이 성령의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바 울 사도의 인간적인 배경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바리새 지도자인 가말리 학파의 수제자였고,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이 분이 복음을 전파하러 나가서는 자신의 설득력 있는 언변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의 능과 힘에 의탁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처럼 설교란 본래 얼마나 신학적이냐, 논리적이냐 보다는 그것이 ‘영혼의 양식’이 되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러 단 위에 선 사람은 매 순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맡기고, 그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의 잠자던 영혼이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나름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정말 삶 자체가 변하는 변화를 맛보는 경우가 참 드뭅니다. 삶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신앙은 기실 ‘죽은 신앙’이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져 우리의 영을 장악한다면, 영적으로도 엄청나게 변하지만 결국 육적으로도 그 변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의 가치에만 목을 매던 사람이, 주님의 영으로 인하여 엄청나게 변해서 결국에는 세상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어떻게 하면 나의 주님이 기뻐하실까? 어떻게 하면 나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재되고 주님께서 천국에서 내 면류관을 준비해주시는 삶을 살까?”만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우리의 품성은 주님을 닮았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이신 주님은 우리의 말 한마디에 서운해 하시기도 하고, 우리의 열렬한 신앙 고백에 ‘네 그 말로 네 병이 나았다’고도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 그분이 기뻐하실 일만 찾아다니는 생활로 변화된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대견하게 보시겠습니까?


큰 돌이든 작은 돌이든 연못에 던지면 둘 다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도 주님을 만나기 전의 상태는 너나 할 것 없이 ‘죄인 된 상태’입니다. 혹 세간에서 ‘저 사람은 참 양심적이다, 착하다’는 말을 듣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인간이란 모두 나무로 치자면 ‘돌 감람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나무는 스스로 열매맺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생명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디어 우리에게도 아주 탐스러운 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에 덴에서 아담이 원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는 곧 영혼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기 전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아주 친밀하게 만나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는 육만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며, 영이 죽은 상태의 인간은 사실 ‘고등 동물’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은혜로 당신의 영을 부어주셨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예 수님을 영으로 만나면 단절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관계’가 회복됩니다. 제일 먼저 회복되는 것이 이 부분인데, 많은 사람들은 ‘은사자만 이런 영적 사역을 하고, 특별히 부름 받은 선지자만 예언을 한다’고들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특별한 사람만 계시를 받는다’고 하시지 않으셨으며,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며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주님의 신부이기도 합니다. 원래 신랑과 신부 사이는 얼마나 친밀합니까? 요컨대 우리가 주님과 영적으로 통화가 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현재 영적인 문둥병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통증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 문둥병처럼,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깜깜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영을 열어주시기 시작하면, 우리의 오감처럼 영적인 감각이 살아납니다. 영입, 영코, 영귀, 영피부, 영심 등 여러 가지 통로가 열리면서 성령님과 영의 세계를 알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직접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영의 일은 애초에 지식과 학문으로 가르칠 사안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당시에도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학식이 높았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정도다’하면서 율법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오늘 성령님께서 누구에게 은혜를 내리시길 원하는가는 전적으로 그분께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예언을 하는 순간, 나는 그저 ‘입만 여는 사람’입니다. 영 입이 열려서 예언을 하는 사람의 경우, 자신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 그 육은 남들과 똑같이 ‘듣고’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7-19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의 영을 열어주시고, 내 영이 바라는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엡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소망이 이 땅에 있는 한, 사람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이 오직 하늘나라로 향하면 이 땅의 소망은 당연히 놓아버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칠 때,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도구로 내 몸을 쓰실 것입니다.



2. 성령 충만하라



내 영이 주님을 알고 깨달아 가면서 이제 우리는 ‘주님’이라는 본뜻 그대로,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내 주인이 아닌 삶 - 즉 나는 주님의 명령을 받는 종이 되는 삶을 살아 나가게 됩니다. 세례를 받았어도 뿌리부터 변화함이 없이 이 전의 삶에 종교적인 색채만 조금 가미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신랑이며 아버지이며 목자이신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이 자리에 주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부터라도 간절한 소망을 품고 21일 다니엘 기도를 하면서 ‘응답을 주십시오’하고 청하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응답을 주십니다. 영을 열어 주시거나, 주변 사람이나 목자를 통해서, 혹은 꿈을 통해서든 분명히 계시를 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항상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 ‘착한 일을 하라, 사랑하라, 용서하라’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라, 귀신 쫓아라’라는 말은 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 이르러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에 관한 말씀을 전한다면 곧장 무식한 사람으로 매도가 되고 마는 게 보통입니다.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볼 때, 영적인 일들이 밝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랑도 용서도 제대로 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영이 열려야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참 진리 안에서 예수님을 나의 ‘참 주인’으로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롬10:17)말 씀을 깨닫는 데 중요한 전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부를 때도 단지 육적인 차원에서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만약 불상에 절을 하던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그래? 그럼 나도 예수님 하고 한번 불러볼까?’하고 잠깐 육으로 주님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받겠습니까?전혀 아니지요.

사실 영이 열리면 내 영혼은 ‘24시간’ 주님을 찾습니다. 설령 육은 자고 있더라도 영은 쉬지 않고 아버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3장 5절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내 영혼에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내가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던 내 영혼이 소생하여 주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아 이분이 내 아버지셨구나. 내 신랑은 예수님이시구나’를 영혼이 알아보게 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능력



이제 고린도전서 4장 20에 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라고 말한 것이 깊이 이해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금 ‘성령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다들 ‘내가 올바른 길을 가르친다’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불’을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며, 그렇기에 믿는 이들 안에서도 성령의 능력은 어렴풋이 이야기로 듣는 것에만 그칩니다.

하 지만 영이 열리게 되면 내 영혼이 직접 주님과 교제하며, 그분으로 인하여 내 자신이 바뀝니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나야말로 마귀의 괴수이고 죄인이었구나’를 온 존재로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영적 문둥병 상태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위선적으로 살았는지가 환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져 올라오는 통회가 일어납니다. 이제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미래 또한 이 거듭남 안에서 모두 바뀌어져 나갑니다.


거 듭난 이들의 삶은 180도 바뀌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사실 많습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령님을 ‘조금’만 내 안에 모시면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나를 이끌어 가실 힘을 받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부분은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참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항상 내 안에 충만한 상태로 계시도록 내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는 술을 마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술을 반주삼아 조금 마시면, 정신이 아주 멀쩡하지요. 하지만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이 다음날 아침에 ‘아니 내가 어제 밤에 어떻게 집에 온 지 나도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영도 똑같습니다. 이분께서 내 삶을 끌고 가야 내가 세상적 삶을 집어던질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에 들어오는 일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어찌 보면 희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기도도 조용히 하지 왜 소리를 지르면서 하는지, 왜 이다지도 요란한지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 말씀처럼 육적인 사람들 눈에는 영적인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

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사람들은 무당이 점치고 굿하는 건 의례 그러려니 하면서도, 예수님의 영광이 직접 나타나면 두려워하고 ‘아니 하나님이 정말 저렇단 말인가? 아니야. 이상해’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주님을 거부하는 마음을 과연 누가 주었겠습니까? 무당들도 실상 처음에는 신 내림을 받기 싫어합니다. 결국 마귀의 종이 되어버리는 삶을 그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자기 의지를 가지고 예수님만을 의탁하면 기도하면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사람들이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불면증 등 현대적인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아이들은 인터넷 중독, 어른들은 화투와 알코올 중독 등 갖가지 중독 현상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병리적 현상들 역시 모두 마귀에게 붙잡힌 결과 입니다. 왜 ‘중독’이라고 할까요? 담배의 예를 들더라도 담배의 ‘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장악하여 도저히 담배를 끊을 수 없게 합니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하겠다고 아무리 결심을 하더라도, 내가 원치 않는데 금단 현상 때문에 담배에 질질 다시 끌려가고 맙니다. 쉽게 말해 담배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중독은 그 이면에 ‘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사람들은 나를 붙잡고 있던 악한 영은 물론이고, 주님의 능력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장악한 영까지 쫓아낼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안 된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 사람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면 마귀는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9-10절 말씀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하셨으니, 우리 스스로는 가난할지라도 바로 우리의 기도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 이웃을 부요하게도 할 수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는 첫 번째 비결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서 영이 열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주님께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라 고 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람들은 병원에 가야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수없이 기적을 베푸십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 아무리 낫지 않던 위장병 등의 여러가지 질병을 가진 분들이 우리 영성원에서 은혜를 받아가면서 서서히 낫거나 혹은 안수 한 번에 낫는 경우를 실로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렇게 주님이 함께하는 이 영광을 경험하고, 내가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걷고 계신다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지당하며, 기도를 해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은 그와 상담만 해도 무언가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능력이 풍성하게 드러나는 삶을 살면서, 주님의 참다운 증인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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