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명 (눅 4:18-30)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1-03
조회수 3629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명 (눅 4:18-30)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1.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시던 장소는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그곳은 당시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선착장이 있었고 갈릴리와도 가까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일으키셨던 놀라운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자라셨던 동네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가운데 마침 당신이 자라신 동네에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회당에 들어가 예수님께서 펼쳐 읽으신 구절은 이사야 61장의 말씀으로, 메시아 예언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 61:1-3)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책을 덮고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느나’ 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뚜렷이 하셨습니다.

 

 

2. 주의 성령이 임하였을 때

 

 

오늘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8절‘주의 성령이 임했으니’ 라고 쓰여 있는데, 이렇게 주님의 성령이 임재하실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가 다음 구절부터 일목요연하게 나옵니다.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난’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함은 물론이고 동시에 영적 갈급함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항상 육적-영적인 측면을 둘 다 알아야 하는데, 특히 영의 가난함은 마태복음 5장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던 바로 그 가난함을 뜻합니다.

영혼의 가난함은 어떻게 보면 주님을 만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영혼의 가난함이 없기에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라는 소리를 들으면, ‘나중에 믿을게’하고 간단하게 거절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심령에는 가난함이 없으며,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적당히 내가 다 할 수 있고, 어느 정도는 남들 수준에 맞춰갈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또 내적으로는 ‘나만큼 양심적인 사람이 어디 있나? 나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주님을 진정 만난 사람의 90프로는 ‘인생을 책 한권으로 써도 모자랄 정도’로 고달프고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그저 평범하게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던 사람들,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삶의 문제는 늘 엉켜있고 시원한 답도 나오지 않아서 ‘주님 주님’하고 매달리다 보니까 진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가만히 있는데 ‘짠~’하고 만화처럼 나타나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아픔,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가운데 주님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으로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라는 구절 역시 ‘성령이 임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포로 된 자에게 자유함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포로가 뭡니까? 이 또한 육적-영적 차원 두 측면에서 함께 이해 되어야 합니다. 물리적으로 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적으로 보자면 ‘포로’라는 말은 영적인 측면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요컨대 내 맘대로 인생이 잘 안 살아지는 것이 ‘영적 포로’로 묶여 있는 상태를 가리키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많은 경우 ‘포로 살이’를 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일례로 물질적 가난은 그 부분에서 마귀에게 잡혀 있다는 뜻이고, 건강, 자녀문제 등 내 의지에 반해서 꼼짝할 수 없이 환경이 가로막혀있는 경우 모두가 다 ‘포로 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영적인 차원은 육의 차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내 영적인 상태가 어떨까?’라는 궁금함이 생긴다면, 내 현실에서 어떤 부분이 고달프고 안 풀려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내 현실이 곧 영적으로 묶인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로된 바가 어떻게 하면 풀린다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주님의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풀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유는 주님의 기름부음이 내 삶에 임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쉬운 예로 우리가 노래방에 가고, 바둑 두고 등산가고 하면서 노는 자리에 있을 때 기름부음이 오겠습니까? 라디오를 켜서 싸이클을 방송 주파수에 맞추듯이 기도로 주님과 싸이클을 맞추어야 합니다.

 

 

3. 수도꼭지를 트는 것은 내 몫

 

 

수원지에서 물이 우리 집까지 왔다면, 이제 남은 일은 내가 수도꼭지를 틀어서 물을 먹는 일 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바로 내 삶에 수도꼭지를 트는 일입니다. 만약 기도와 영적인 삶을 잃어버린다면 물은 우리 삶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님의 축복이 집 앞까지 왔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수도꼭지가 열리지 않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도 이미 주님의 성령을 받으신 성도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하지만 ‘충만’이 중요합니다. 그냥 조금 맛만 봐서는 안 되며,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삶에서는 여전히 마귀의 올무에 끌려 다녀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마귀를 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포로된 것들이 자유롭게 됩니다.

사실 믿는 자들에게 가장 관심 있는 부분도 이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까닭도 복 받고, 건강하고,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나아가 나의 체험을 다른 이에게 실질적으로 증거 하는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헌데 부르짖어 기도하는 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통성 기도는 무척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본성이란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악한 길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주님의 영을 내 삶에 초대하고, 이분께서 나를 장악하시도록 하는 노력이 기도입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주님의 오셔서 나를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복종시키면서 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처럼, 기도도 사실은 육적으로 보면 하기 싫은 것이 당연하기에 다만 이를 악물고 해내야 합니다.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어느 단계로 올라가면 묶인 부분이 풀려가며, 기도에도 탄력이 붙어서 기도하기가 조금 할 만 해 지긴 합니다만, 여전히 기도하기란 매번 어렵습니다.

 

사역을 할 때도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멈추는 순간 다시 원상태대로 돌아갑니다. 기도와 영적 사역은 물이 끓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98도까지 온도가 올라왔어도, 100도에 이르지 않은 채로 불을 꺼버린다면 물은 끓지 않은 채 서서히 0도로 내려갑니다.

영적 싸움도 이와 똑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나를 장악하실 때가지 간절히 부르짖어야만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시고, 나를 누르는 악한 영을 결박 시키셔야만 비로소 그 악한 영이 나갑니다.

마태복음 12장 28-29절 말씀에 이르시길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기도하거나 다른 사역자에게 치유기도를 받을 때, 양자 모두 주의 성령이 악을 결박할 정도의 힘의 단계에 올라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혹자는 ‘아니 어떻게 성령님이 악령보다 약할 수가 있느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기도로써 성령님의 힘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느냐의 문제로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수원지에서부터 물이 내 집 문 앞까지 차올라 왔어도,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콸콸콸 나오게 하는 것은 내 몫입니다.

 

또한 사역하다가 힘들어지면, 육을 죽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금식에 들어가서 더욱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 논리는 세상과 전혀 다른 논리입니다. 세상에서는 힘이 들면 ‘우선 먹기라도 잘 해야지’ 하고 말하지만, 주님의 방법은 정 반대로 ‘내 육체가 죽고 진이 빠진 만큼’ 주님의 영이 나를 장악하시기 더 쉽습니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가 없어진 만큼 주님께서 나를 더욱 사로잡으십니다.

우리가 금식하고 회개를 할수록, ‘죽은 줄 알았는데 매번 다시 살아나는’ 육을 더욱 철저히 죽일 수가 있습니다. 영적 싸움에서는 한번 내가 죽었다고 ‘아 이제 됐구나’하고 안심할 새가 없습니다. 매순간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사로잡은 상태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과 내 방법이 아니라, 마치 저절로인 듯 주님이 원하는 방법대로 살아지고, 이럴 때야만 내 삶에서 포로된 것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당연히 이어질 것은, 내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해 나가면서 주변에 여전히 포로 상태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포로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괴롭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 묶임에서 도저히 풀려나지 못하는 상태를 두고 ‘매인 바 되었다’고 합니다. 이 해결은 다른 방법 없이 주님의 성령이 오셔야만 풀립니다.

 

 

4. 영적 사역의 중요성

 

 

주님의 성령은 이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이 열리게 하고, 포로된 자를 살게 하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원복음에 비추어봤을 때, 지금 이시대가 얼마나 초대교회의 사역들을 다 잃어버렸는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사역들을 크게 추리면 사랑하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삶 속에서 영적 사역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영적 사역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15~20년 전만 하더라도, 기도원 가서 은혜 받은 게 자랑이었습니다. 주일 예배에서도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서로 나누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서는 기도원 가는 게 이상한 일, 유별난 믿음으로 여겨지니, 기도원에서 은혜 받은 것을 자랑하기는커녕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실상입니다. 이 문화야말로 마귀가 만든 문화가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성경 말씀은 영이 열리지 않은 채 신학적 지식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말씀 전체가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단에 오르는 사람은 두말할 없이 반드시 영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설교가 흘러가고 맙니다.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오면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8절눌린 자를 자유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밖에 나가 어떤 풀 위에 돌이 놓여 있는 곳이 있는지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풀을 누르고 있는 그 돌을 들어서 치워보면, 그 동안 돌에 눌려있는 부분이 누렇고 말라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영적인 눌림도 이와 똑같습니다. 사람마다 눌린 곳, 눌린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를 누르고 있는 마귀 권세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실제 삶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짓눌려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실로 어마어마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영적 싸움에서 내가 마귀를 하나씩 이겨나가면 실제로 환경이 열려나감을 경험하며 이 땅에서도 놀라운 축복을 더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눌린 자, 포로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적 법칙을 내가 깨닫고 삶에서 주님의 은혜를 만끽하고 살면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남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면 주님 일을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또 내 안에 예수님의 눈이 들어와서, 주님의 시각으로 옳고 그름이 새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데, 주님께서 판단력을 주시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리고 주님은 마치 침몰해가는 타이타닉 호처럼 영적으로 침몰해가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한 주님의 안타까움을 나도 똑같이 느끼게 해 주시고, ‘네가 내 사사명을 받아서 이 침몰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적당한 마음으로는 결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전신 무장을 해야 악한 영을 쳐 이길 수 있는 자세가 갖춰집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성령을 공급받아 승리하는 삶을 쟁취하시길 간구합니다.

첨부파일
카테고리 서모세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