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온전한 회복 (사 35:1-10)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1-03
조회수 3302

 

온전한 회복 (사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1. 전인적 회복의 약속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 35장은 구속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시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시대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때가 되면 본문 말씀의 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계시를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미 계시된 회복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늘나라를 가지고 오시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한마디로 해방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사후에 천국을 간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전인적인 회복을 받는다는 메시지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의 면면을 살펴봅시다. 자녀 문제, 건강문제, 물질 문제 중 어느 하나 속 시원히 잘 풀려있는 경우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이는 곧 우리 삶의 그 부분이 마치 ‘바벨론 포로’처럼 압제당하고 있음과 동일합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여러 번 읽고 깊이 묵상하면서 ‘내게 해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큰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 해방을 맛보면서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예수님의 복음과 더불어 우리 삶에 적용시키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2. 사막에 백합화가 피어나리라

 

 

1절 부터 보겠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먼저 광야가 기뻐하며 사막이 즐거워한다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광야나 사막이 무엇인지 얼른 와 닿지 않지만, 이스라엘을 가보면 정말 ‘풀 한포기 없는’ 환경이 무엇인지 아주 실감이 납니다. 이러한 땅에서 물이 확보되지 않은 채 길을 잃거나 하면 ‘이제 죽었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풀이 돋아나는 땅은 그나마 물기가 있는 땅이며, 물은 모든 생명의 기본 요건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주변에는 물기가 아예 없는 척박한 땅이 많습니다.

 

헌데 본문 1절에서 그 땅에 백합화가 피리라는 놀라운 약속이 내려집니다. 우리 삶 속에도 사막처럼 물 한 방울 없이 아주 목이 바짝바짝 타는 문제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 중에서도 말할 수 없이 힘든 고통을 겪는 분들이 계신 줄로 압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백합화가 핀다는 약속은 요컨대 육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인간적으로 아무리 궁리해봐야 해결이 나올 수 없는 문제들이 주님의 은혜로써 풀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듣기만 해서는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내 삶에 적용시키고 나아가 이 세상에도 복음을 적용 시켜야 하는데, 이제 적용이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에 복음이 막 들어오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물질적으로 상당히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주는 외국 선교사들도 많은 경우 물질과 함께 여러 가지 구제 사업을 동시에 펼쳤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빈곤한 삶에 물질도 실제로 뚫어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던 시대에는 저마다 주님께 매달려서 기도하며 은혜를 받아 삶을 잘 헤쳐 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 그 복음 덕분에 저주가 풀려서 어느 정도 생활이 윤택해지자, 아이러니하게도 기도를 점점 잃어가는 국면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현 시대의 신앙은 점점 편한 데로만 흐르고, 복음의 본질은 서서히 퇴색해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지금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우리 교회 안에서 희생은 커녕, ‘더 좋은 것, 더 복된 것’만 찾는 사람들만 늘어나는 형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회개 찬양도 잘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냥 복 받으라고만 해야 사람들이 좋아하지, 회개하라는 설교나 찬양이 들리면 사람들은 다들 떠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본질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복음이 내 삶에 적용되는 때는 주님의 임재가 충만하여 내 삶을 주님께서 온전히 통치하시는 때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자연히 떠날 수밖에 없듯, 내가 주님과 실제로 더불어 살아야 내 삶의 질곡들이 풀립니다.

복음은 정말 삶이 지쳐있고, 정말 척박하고, 정말 갈급한 곳에 생수가 터져 나오듯이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찰 수 있음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이 이와 동떨어져 있다면, 어디서부터 무엇이 ‘주님의 임재’를 가로막고 있나 먼저 돌아보아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다른 한편,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의 증가가 멈추고 오히려 불교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실태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단학, 기공, 뇌호흡 등 비슷비슷한 사이비 종교가 유행이기도 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빚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들을 쫓아가면 즉시 건강이 좋아지는 게 몸으로 확확 느껴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내가 지금 몹시 아픈데,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실제로 ‘주님의 은혜로써’ 치유를 받지는 못한 채 막연히 ‘사후에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만 듣는다면, 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원래 치유는 교회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삶에서 실제로 생동하는 사람은 영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육적인 부분, 즉 가난, 병마 등에서도 해방되어 전인적인 구원을 만끽하며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 교회에서는 ‘치유’라는 개념조차 사라진 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혹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오히려 건강에 좋다고 선전하는 사이비 종교들을 영적으로 보면 참으로 무서운 실체들이 뒤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치유를 받는 건 결국 마귀를 영접했을 때 그들이 주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도 마귀는 세상의 것들로 유혹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명예나 부에도 마귀가 주는 것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실에서도 당신의 축복과 해방이 확실히 나타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이러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이 시대의 실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때 악한 영들이 우리를 결박시킨 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하셨습니다.

아담의 후예들은 아담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마귀에게 삶을 장악 당한 채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영적 법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과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이 메마른 사막이나 가시덤불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급한 인간의 삶에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이 저주를 풀어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허락하신 이 해방의 메시지는 그대로 메시아 사역과 연결됩니다.

 

 

3. 두려워하지 말라

 

 

다시 본문 3~4절을 보면, 복음이 우리 삶에 들어올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쓰여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믿음이 약하다보면 두려움이 옵니다. 두려움은 저마다 분야가 다릅니다. 물질이 문제인 사람은 늘 ‘이러다가 망하는 게 아닌가. 내가 밥은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가 하면, 건강이 문제인 사람은 언제나 건강 때문에 조마조마 합니다.

악한 영들이 두려움의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삶이 너무나도 곤고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두려움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즉 사랑이 완성되면 그 무엇도 나를 두렵게 할 수 없으며, 악한 영들도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찬양을 부를 때도 그냥 부르는 게 아니라 온 맘을 다해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며 힘차게 부른다면, 부르는 동안 나도 모르게 힘이 생깁니다. 반대로 악한 영이 주는 생각에 속수무책으로 ‘그래 내가 뭘 하겠어?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을 붙들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집니다.

 

위의 말씀은 주님께서 인생에 비전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얘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너를 구하시리라’ 하면서 우리의 힘을 북돋아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내 귀에 들릴 때 우리는 얼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플러스로 가시며, 우리도 이 플러스에 우리 몸을 실을 때 내 삶의 회복을 맛볼 수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 복을 주시고 저주를 풀어주시는 분으로 이미 오셨기에, 이제는 내가 이 복음을 ‘내 것’으로 받아서 삶에 활용시키고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은 진정으로 ‘나의 복음’이 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마귀는 끊임없이 던져주며 평화를 갉아먹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걸 믿어라’고 항상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물질계 역시 한정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며, 우주 만물에 편만하게 현존하신 분입니다. 즉 주님은 언제 어디서든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름 ‘미가엘, 다니엘’에서 ‘엘’이라는 말은 ‘권능자, 능력자’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하나님이 무소부재 전지전능한 분임을 알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곳에 편재하시는 분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호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겁니다.

단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그때만 성령님께서 우리 삶의 자리에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말씀을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실로 믿지 않는다면 내 영혼은 좌절과 낙심, 불안에서 허우적대면서 마귀를 다시 불러들이는 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믿음 안에 온전히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찬양을 부르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이러한 노력에 포함됩니다. 영이 완전히 열리면 사실 크게 부르짖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의 공격을 쳐내고 우리의 영이 쭉쭉 주님 안에서 성장하게 하기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겁니다.

그렇게 영이 열려가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믿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서 나의 영에 자신이 서기 시작하지요. 영이 열려가는 동안에는 크게 소리 내어 선포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말씀 속에 권세가 있어, 부정적인 것들이 말씀으로 인하여 떠나고, 주님의 플러스 방향으로 긍정적이게 바뀌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4. 메시아의 사역

 

 

계속해서 5~6절을 보면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4-5절 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잠시 시험이 들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게 하였습니다. ‘당신이 정말 제가 기다리던 메시아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더 기다려야 합니까?’.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메시아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본 대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실제 사역을 보면 구약에서부터 수많은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메시아임을 저절로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뜻이었습니다.

     (마 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 깊이 개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늘 높은 곳에 좌정하신 채 막연히 우리의 숭배만 받길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우리의 눌린 곳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지금 내 삶의 자리에도 그 사역이 이루어져야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자신이 지금 예수님의 능력을 받을만한 송유관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역이 우리 삶에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회복 사역 안에서 우리 삶의 가장 답답한 문제가 실제로 풀려나갑니다. 우리의 눈이 실제로 감겼다고 한번 잠깐 상상이라도 해 봅시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러면 이 소경에게 가장 기쁜 일은 눈을 뜨는 일 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또 귀머거리에게는 귀가 뚫리는 게 가장 기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실제로 무수히 많은 사역 중에 이 사역도 하셨습니다.

 

한편 본문의 소경과 귀머거리가 보고 듣게 된다는 구절은 영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영적 사역에서는 ‘영의 눈, 영의 귀’가 열려야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영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우리의 오감은 그저 육적인 오감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 영성원에서도 영의 코로 여러 가지 냄새를 맡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치유 사역이 일어날 때 소독약 냄새가 나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타는 냄새, 악취가 나기도 했습니다. 둘 다 치유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악한 영이 나갈 때 악취를 풍기면 나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자리에 임재하신 것을 여러 가지로 느끼고 알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영적으로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것이 다름 아닌 영적 문둥병의 상태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육적인 회복, 영적 회복을 모두 같이 이룹니다.

영이 열릴 때는 한 순간에 확 열립니다. 주님께서 그날 열어주시면, 나도 모르게 그냥 열리는 것이 영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영적 세계의 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사전 지식이 없던 사건들이 저절로 알아지기도 합니다. 이 체험들은 사실 이 자리에서 다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영의 회복까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 완전한 회복입니다.

 

 

5.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6절 에 이어서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 장면을 한번 잠깐 떠올려보십시오. 얼마나 신이 납니까! 다리 저는 자가 마치 사슴처럼 뛰며, 벙어리의 혀가 풀려 노래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헌데 이렇게 한 구절 한 구절마다 기쁘기 그지없는 복음의 말씀이 실제 우리 삶에 적용되는 부분은 참 적은 것 같습니다. 현재 원복음이 얼마나 퇴색되어 있는지를 보자면 정말로 가슴이 아픕니다. 복음 안에 충만히 사는 삶은 한마디로 사도행전적인 삶입니다. 조금의 종교성으로만 유지되는 종교생활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고쳐주시고, 반드시 열어주시고,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시는 주님입니다. 그 일이 실제로 우리 삶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복음을 들었다고 해도 뭐 그리 기쁘겠습니까. 내 삶에서 죽어가던 부분이 기가 막힐 정도로 해결을 받고, 영적으로도 놀라운 차원의 세계에 대해 확 열리면서 너무나 좋아 기뻐 춤추는 것이 우리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7절 말씀을 보면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승냥이가 눕던 곳은 바로 귀신이 완전히 장악했던 우리 삶이 낙원으로 변할 거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기도하고 은혜를 받을 때 내 안에 있던 승냥이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주의 빛으로 내가 가득 채워질 때 영이 열려가면서 환경이 풀려나갑니다. 원수처럼 나를 짓밟아 대던 이들이 떠나가고, 나를 돕는 자들로 내 주변이 넘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반드시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으신 복음을 내 삶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실현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올바른 송유관이 되어 내 삶에서도 복음을 만끽하고, 이 기쁨을 남에게 전해주는 증인이 되는 게 우리의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단지 말로만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할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이 배고플 때 밥을 사주고,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 하는 동안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나고 그의 문제가 풀리면, 바로 한 사람을 주님 복음의 세계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믿지 말라고 해도 믿으려고 주님을 쫓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희망과 비전의 말씀을 선포하며 한걸음 더 빛의 세계로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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