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성령님의 일과 육체의 일 (갈 5:16-23)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1-03
조회수 3816

 

성령님의 일과 육체의 일 (갈 5:16-23)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 우리는 원래 청지기입니다

 

 

우리가 삶에 감사하지 못할 때는 마태복음 24장의 달란트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흔히 영적인 능력만을 달란트로 생각하기 쉽지만, 달란트는 주님께서 내 삶에 주신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 건강, 내 자녀, 내 집안, 나의 삶에 주어진 것이 전부 다 달란트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인데, 특히 우리 개개인마다 맞춰서 주셨습니다. 각기 받은 바대로 주님 일에 기여하기를 바라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사를 살면서 속상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속이 상한 것도 가만히 따지고 보면, 우리의 착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 삶의 모든 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다들 철썩 같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내 것’인 줄 알고 살고 있을 때, 그 ‘내 것’이 침범당하면 우리는 화를 내고 속상해 합니다. 바로 지키고 싶은 ‘나’가 침범 당해서 그렇습니다. 외부의 물질이나 환경뿐만 아니라 인격에 금이 갔을 때, 또는 자존심이 상했을 때도 우리는 그만 속이 상해서 어쩔 줄 모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주님 것을 맡은 청지기여야 하는데, 그것들이 ‘내 것’인 줄 착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세례와 함께 분명히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도 여전히 그 ‘나’가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을 살면서 우리는 육체와 영적인 것을 정확하게 구분해야만 악한 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속상했던 일들 하나하나를 주님 안에서 내려놓고 살펴보면, 또 내 삶의 모든 것을 환원하여 ‘내 것은 하나도 없이 나는 청지기이며, 옛 나는 죽었다’라는 차원에서 보면, 그 모든 속상했던 일들에 대해서 자유로워집니다. 예를 들어 신랑이 나를 욕해도 ‘따지고 보면 신랑이 내 것도 아니고, 이 땅은 내가 잠시 있다가 가는 것인데!’ 하면서 마귀의 올무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두 소욕의 줄다리기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몸 안에는 세 가지 차원이 함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악령이 있고,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내 안에 이 모든 것이 있다는 점은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말씀은 요컨대 내 안에서 성령님과 육체가 싸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온전히 성령님의 뜻에 일치해 살면서, 내 자신이 죽어 없어진 그대로 성령님이 이끄시는 그대로 따라간다면 육체 욕심 역시 저절로 죽어 없어집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 육적 인간이 세례와 더불어 죽고, 주님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있다면 그분께서 우리 문제들을 다 해결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삶에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면 먼저 ‘내가 아직 다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힘을 힘차게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차원을 알지 못하면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받기가 어렵습니다.

 

17절의 말씀은 더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소욕이 대적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줄다리기가 일어나는 것도 우선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다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어차피 그냥 육체에 끌려 다니는 형편이니 줄다리기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 나에게 들어오셔서 나를 장악하면서부터, 이제 영적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자녀가 되기 전의 육체-옛사람이 마귀의 자녀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성령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도 실천하기가 몹시 힘들다는 것을 누구나 다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을 영접하면서 술을 끊고자 해도, 이미 술에 중독된 상태이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로만은 도저히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약 중독자들도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아편을 끊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대로 마약을 못 끊는 까닭은 이미 그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삶이 도대체 어디로 향해 가는지 도무지 모르는 채, 마냥 마귀가 주는 착각 속에서 살면서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깜깜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이 왜 살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영혼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주어졌습니다.  철학과에서 아무리 파헤쳐도 찾지 못했던 인간 삶의 해답이 예수님에 의해 환히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적 전쟁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즉시 악령이 나가는 게 아닙니다. 죄는 용서가 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악령의 흔적은 떠나지 않고 있는 게 실제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힘을 공급받아 저주를 물리칠 때 승리를 맛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이후,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엄청난 전쟁 아래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원칙은 내가 어느 편에 힘을 싫어줄 것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세상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충 신앙생활을 하면, 주님께 구원을 받았으나 삶의 질곡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내 삶에 칼을 대어 악을 끊어내고, 이를 악물고 과거를 청산해가면서 부르짖어 기도하면, 나라는 존재가 점차 사라지면서 성령님께서 이기기 시작하십니다. 이때야 비로소 나는 참다운 청지기의 삶을 살게 됩니다.

 

 

3.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신 주님

 

 

성도 여러분, 육체의 소욕이라는 것은 사실 다 뻔 하지 않습니까? 본문 22절부터 이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그런데 우리도 주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여기에 흠뻑 젖어서 살았습니다. 즉 이들이 바로 나의 주인이었던 겁니다.

 

로마서 5장 17절 말씀을 봅시다 :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다시 말해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사망 권세가 나를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한 후나 자신이 죽고 청지기라는 본래 내 자리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내 삶을 승리로 이끄십니다. 의가 왕이 되셨으니 당연합니다.

이 반전은 내가 어디에 신앙의 좌표를 놓고 순종하고 살 것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때 잘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혹자는 ‘아니 그러면 성령님이 악령에게 질 수도 있다는 말이냐?’라는 식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주님께서 선택권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내가 문 밖에 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즉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인데도 이토록 철저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게 한다고 하셨지, 강압적으로 인도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영적 사역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손에 죽은 이도 살릴 수 있는 당신의 그 영광을 주셨지만, 만약 우리에게 사역할 의지가 없으며 능력을 받을 자세도 되어 있지 않다면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사역을 받는 성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역자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주님의 능력이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져 나옵니다. 하지만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스펀지에 물 빨려 들어가듯 좍좍 빨려 들어갑니다. 예언 사역은 그 사람이 원치 않아도 주님께서 그를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사역자에게 주셔서, 마음이나 병이 끄집어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름부음이나 불 사역은 받는 사람 쪽에서 마음을 닫으면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병을 고쳐 주신 후에 항상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원래는 ‘내 능력이 너를 고쳤다’ 하시는 게 맞지요. 그러나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하늘나라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온 맘을 다해 성령님을 환영하고 내 삶의 한 가운데에 초청하고 믿을 때,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적인 사역에서는 지금 누가 단 위에 강사로 섰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설교의 목적은 성도의 마음을 주님께로 활짝 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의 귀가 높아져서 설교에서 좋은 예화를 찾는 경향이 크지만, 사실 설교의 원칙은 성령님을 영으로 만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주님을 사모하고 초청하는 데에 도화선이 될 수 있는 설교, 말하자면 요리사가 훌륭한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서 손님에게 가져다주듯이, 말씀을 좀 더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설교의 본래 취지입니다. 요컨대 설교는 성경 말씀이 충실히 전달되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지 세상적인 이야기가 들어갈수록 온전치 못한 설교가 되어버립니다.

 

 

4. 감사하고 찬양할 때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오면, 우리가 온전히 주님의 길을 따르지 못하는 까닭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14-24절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 자신이 육체의 소욕에 대해 얼마나 통탄해 했는가가 잘 드러납니다. 이제 영인으로 거듭났기에 나는 신령해야 하는데, 아직도 누가 나를 건드리면 성질이 확 나버립니다. ‘내가 사도로서 이래야 되겠나’ 하고 애통하지만, 육적인 것이 단번에 뽑혀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과 상통합니다. 즉 우리의 육체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가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절대 호락호락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성경에 이렇게나 정확하게 쓰여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영은 어느 때 밖으로 드러날까요? 오직 성령님의 강한 기름부음으로 인해서만 드러납니다.

 

우리 영성원에 처음 오신 분들도 예언 사역을 받을 때 그 영혼이 감격해서 우시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는 내 육체는 잘 모르지만 영혼이 성령님을 보았기 때문에 저절로 울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강하나 임재로 말미암아 악한 영이 쏟아져 나오면서 치유가 빨라지고, 환경적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 자신의 병마, 자식 문제, 가정 문제, 가난, 사업 등 우리 3차원의 세계는 그보다 높은 차원인 영적인 세계의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영적인 차원에서 악한 영이 나가면, 물질세계의 문제들은 자동으로 풀려나갑니다. 이때도 성령님은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시급한 것부터 해결해주십니다.

예를 들어 나는 병마에서 벗어나는 게 급한데, 성령님은 돈부터 해결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것에 안달하지만 주님은 영원에서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루어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5장 8장 말씀에 ‘네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주님 내가 이것을 원하지만,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저는 모릅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알아서 인도해 주시옵소서’하는 순종과 승복의 기도입니다. 나에게 향하신 주님의 선하신 뜻을 깊이 깨달으면 삶의 모든 문제 앞에서 불평하지 않고, 그 반대로 어떻게 해도 감사만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도 점치는 여종 안에 있는 마귀를 쫓아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주님의 길을 가는데도 감옥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쩌면 ‘주님 해도 너무합니다. 제가 주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런 환란이 닥치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라며 주님을 원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 차꼬가 풀리고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행 16:24-26)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우리 각자의 삶에도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묶은 차꼬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처럼 기도하며 찬송할 때,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며 차꼬가 풀립니다. 한 단계 더 나은 기도는 ‘감사하며 기도하기’입니다. 환경적인 문제가 아무리 우리를 에워싸더라도 우리는 이미 주님을 만난 사람들 아닙니까. 그 만남 자체에 깊이 감사하며 기도할 때, 어떠한 환경도 우리를 묶어둘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은 어디에 와 있나 돌아봅시다. 비록 지금 짓밟히는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입술에서 진정한 찬양이 나옵니까? 아니면 ‘주님 해도 너무합니다. 제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하고 주님을 원망하십니까?

 

우리 성도들의 삶은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영적인 싸움입니다. 작은 승리를 하나씩 맛보면서 깊은 지성소까지 들어가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내가 죽고 감사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할까?’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야 깊은 지성소 안에 들어갑니다. 그 안에는 해함도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없으며, 그 분께서 모두 채워주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이 주님을 은혜 가운데서 만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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