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사랑 2 (요일 2:9-11)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1-03
조회수 3107

 

사랑 2 (요일 2:9-11)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1. 형제와 화목하라

 

 

이번 시간에는 지난번 요한일서 2장 15-17절에서 이미 다루었던 “사랑”을 주제로 한 번 더 깊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첫 번째 구절인 9절 말씀은 우리가 빛 속에 산다고 하면서, 즉 예수님과 함께 일체가 되어 산다고 하면서 내 옆의 형제, 자매를 미워한다면 참으로 모순되지 않느냐고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수님께서도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만약 원수진 사람 있으면 제물 바치지 말고 먼저 가서 화해를 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까지 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우리 가슴에 원한이 맺혀 있으면 우선은 자기 자신부터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내적 치유할 때면 나를 가장 속상하게 하는(했던) 사람, 내가 미워하는(했던) 사람을 생각하고 주님의 치유를 구하라고 합니다. 원망과 미움은 생각과 동시에 올라오는데, 바로 이때 주님의 은혜가 쏟아지면 이들이 나가기 시작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하면서도 그 안에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여전히 (부분적으로나마) 마귀의 올무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온전한 빛 속에서 살며, 자신이 빛 속에 살기에 남을 죄짓게 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반면 누군가 남을 미워한다면, 그의 영도 어둠에 가려져 온전한 판단력을 지니고 세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법칙이 성립될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일체가 된다면, 모든 일을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눈을 주셨습니다. 허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흠뻑 젖은 채 세상의 방법이나 지혜대로 사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고린도전서 13장의 삶을 제대로 실천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듯 ‘사랑장’이라고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에 비추어서 몇 가지 단편적인 것만 얼른 생각해보더라도, 우리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우리는 참고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 여러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정말 주님의 길을 간다면, 그 사람이 정말 주변의 형제 자매를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느냐, 옆의 이웃이 어렵고 힘들 때 생명의 길을 전해주면서 그들을 온전케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냐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라고 이르셨습니다. 만약 내가 재물을 가지고 있는데, 옆의 이웃이 밥도 못 먹는 것을 뻔히 보면서 입으로만 ‘복 받으시오’ 하고 입으로만 덕담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2. 나를 죽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

 

 

어쩌면 지금 이 시대는 진실 된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행하지도 못하는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엄청나게 이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만나고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나의 이기적인 것들을 말씀으로 죽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시대에는 교회에서도 ‘나를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아주 껄끄럽게 변해버렸습니다. 실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만 하면 성도들이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사실 저만큼 ‘기도하라, 문제 해결 받아라, 복 받아라’를 강조하며 설교하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 “사랑하라”의 원칙을 모르면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워지지가 않습니다.

부르짖어 기도 하고, 그 기도로써 주님의 힘을 공급받아 현실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기도를 하려면 그 기도는 아예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두 명의 자식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한 아이는 내 말을 지지리 듣지 않으면서 달라 저거 달라’ 하는가 하면, 또 한 아이는 내가 바라는 것을 척척 실행하고 또 말도 안했는데 내가 좋아할 일만 찾아서 하면서도 무얼 달라고 하지 않다면, 여러분들은 누구의 형편을 더 살피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37장 4절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은 곧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을 바꾸어 말하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 요절에 앞선 요한일서 2장 5-6절에서는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에 분명히 나와 있듯, 주님 안에 산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과 똑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고 있습니까? 과연 누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살아야 할까요? 남보다 좀 더 선하고,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는 종교생활 안에 들어와 있는 것에 그치는 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예수님의 신부로 사는 삶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신랑과 신부가 격에 맞아야 중신도 선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예수님은 빛 자체이신데, 신부가 어둠으로 새카맣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대충 이 정도’라는 말이 적용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네가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며, 네가 말씀에 순종하고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야 과연 참다운 신부로 살 수 있다고 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실제로 가는 삶이란 어떨까요? 세상적 시각에서 보면 주님의 길을 걷는 삶은 하나같이 손해 보는 것들 투성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속으로는 다들 ‘한번 초대 받은 내 인생, 얼마나 중요한가?’하면서 내 인생을 그렇게나 챙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정 반대로 네 모든 걸 촛불처럼 불사르라고 하십니다. 남을 위해서 네가 썩어지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족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하기 싫은 것에서는 쏙 빠지고 내 칼라에 맞는 것만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의 지혜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온전히 만난 사람은 ‘나, 나의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실까’에 골몰하고 그렇게 살기에 바쁩니다. ‘내가 어떻게 더 순종할까?’하는 질문을 스스로 합니다. 인간의 본성대로 치자면 죽기보다 힘든 게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과 믿음일 것입니다. 젖먹이 어린아이만 보더라도 본능적으로 인간은 ‘내 거, 내 거’ 를 외칠 줄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주님 일 때문에 죽도록 고생을 하면서도, 옆의 사람에게 조차 자기의 고통을 아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숙된 신앙을 통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주님은 우리 후손들 천대에 걸쳐 복을 주시고 우리 영혼에 복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고생만 하고 다 양보만 하라고 하시진 않았습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된다면, 이 땅에서도 복을 내릴 것이며, 사후에는 아름다운 유업을 주실 것이며, 후손들에게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 약속을 바라보며 이 힘들고 어려운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3. 예수님이 하신 그 극치의 사랑

 

 

또한 요한일서 4장8절에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그렇습니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일 중, 이처럼 말이 안 되는 사건이 어디 있을까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처참하기로 이루 말 할 수 없는 형벌을 받으시면서, 인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조금만 둘러보자면, 아주 조그마한 권력만 있어도 손 하나 까닥 않고 남을 부리고, 재산으로 치자면 후손 몇 대 것을 챙기려 하는 게 보통 힘 있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간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극치인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탐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저 자신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 누구와도 다를 바 없이 탐욕, 혈기, 이기심으로 가득 찼던 존재였습니다. 제 안에 있는 악을 빼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는데 로마서 7장14-15절에서 사도 바울의 기록을 보고서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주님의 계명이 육신을 완전히 다 벗지 못한 우리들에게 아무리 지키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옆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신앙생활을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옆 사람과 비교하면서 ‘이 정도면 나도 괜찮지 않은가?’ 하고 자족하는 신앙생활은 암 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신앙생활은 철저히 나와 주님과의 일대 일 관계입니다.

구약 속 선지자들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 믿었던 게 아닙니다. 민족 전체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이 다 믿는다고는 했지만, 실상 제대로 믿는 사람이 당시에도 너무나 적었기에, 구약의 선지자들은 홀로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분량만큼 내가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면, 이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신데, 내가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나 자신을 희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만큼’ 주님을 못 만난 것입니다.

예언 능력이 나를 통해서 나온다면, 주님을 ‘조금’ 만난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여러 가지 은사들을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은사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이제 내가 다른 새로운 길을 이야기노니,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하면서 이어 지는 장이 13장, 즉 ‘사랑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사랑입니다. 아직 내가 예수님이 하신 그 극치의 사랑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아 내가 아직도 이렇게나 부족하고 미약하구나. 아직도 도달하지 못했구나’하고 생각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이 사랑입니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을 한다면, 그 모든 주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랑으로 인하여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리 지금 우리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예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일평생 신앙생활 안에서 사랑을 배워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완성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 목표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매일 ‘주여, 용서하여 주십시오. 또 제가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하면서 나를 버리고, 내 이기심과 이익을 버려 나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성화되어 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4. 기도와 순종의 상호 작용

 

 

기도가 우리 신앙에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서 기도한다면 그 기도 역시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주님과 일체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우리 영성원에서 이렇게 기도 훈련을 받으면서 영이 차차 열려가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기 계신 성도 여러분들도 일부분은 모두들 체험 하고 계십니다. 귀신도 알고 성령님도 느끼지요. 하지만 행하면서 느껴야 합니다. 느끼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사랑으로 일체된 관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막연하게 ‘사랑, 사랑’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7절 말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의 빛이 들어오면 ‘순종하고 싶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어옵니다. 주님은 빛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두 가지 면을 다 지켜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하나이고, 항상 기도하는 삶이 다른 하나입니다. 생활 중에는 주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또 기도할 때는 주님의 빛이 들어와서 이로 말미암아 주님께 순종을 하게끔 이 두 가지는 상호작용을 합니다.

특히 기도를 하면서도, ‘기도해서 능력받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 말씀에 순종을 할까’ 라는 철든 사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 제가 주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가장 바람직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 말씀에 근접하여 나를 비추어보면 볼수록 내가 너무나 순종하지 못함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마치 컴컴한 곳에 들어와 있으면 내 옷의 더러움도 그 어둠에 묻혀서 보이지 않지만, 환한 빛 아래에서 보면 작은 먼지까지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연약함과 지킬 수 없음을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 주님께 매달려서 ‘지킬 힘을 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신부답게 변화되어가는 상을 주님께 내놓아야 합니다.

 

 

5. 순종의 통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

 

 

베드로전서에도 보면, 우리는 ‘착한 일을 하고서도 핍박 받으라고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

     (벧전 3:13)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세상 논리로 따지자면 이처럼 억울한 게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사랑의 길입니다. 선지자나 사도가 언뜻 보기엔 대단히 찬란하고 멋진 것 같지만, 이들은 사실 이 길을 모두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실행하는 삶이란 힘듭니다. 따지고 보면 다 내게 손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사랑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정말로 이를 행할 때 주님께서는 기뻐하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처음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복 받는다, 천국 간다’라는 복음의 큰 줄기를 듣고 주님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 복음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기쁘고 복된 소식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되어 갈수록 성경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준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삶이 실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논리를 따지지 않고 그 좁은 길을 걸어갈 때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그 ‘순종하는 통로’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구약 여호수아에서 제사장들이 계약의 궤를 들고 요단강을 건너갈 때 마침 우기라 물이 범람했었지요. 그런데 여호수아가 먼저 ‘요단강은 갈라질 지어다’ 하고 선포하고 강이 갈라진 다음에 그들이 강을 건너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데, 그때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그냥 들어가라’고, ‘순종부터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요단강을 밟았고, 바로 그 순간 강이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순종하지 못한 사람은 역사와 기적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님이 기적과 표적의 하나님임을 체험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신뢰가 점점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단, 오늘 본문 말씀대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은 사랑하고 희생하는 삶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힘들더라도 주님의 지상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순종하지도 못하며, 그 열매도 맺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함이 사랑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도 나날이 성숙되는 신앙생활 안에서 풍성히 열매 맺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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