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선택받은 우리 (벧전 2:6-9)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1-03
조회수 2629

 

 

선택받은 우리 (벧전 2:6-9)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무수한 기적과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세상에서 도대체 일어날 수 없는 이적들을 그토록 행하셨건만, 육적인 사람들은 그 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 이는 목수인 요셉의 아들 아니냐. 나자렛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어찌 지냈는지도 내가 다 아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태도를 고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안타까워하시며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라고는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이 귀는 육적인 귀가 아닙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야 성경 말씀이 생명력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며, 마치 큰 바위로 내 심령을 때리듯 내 안에서부터 불이 붙듯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17절에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분께서 계시의 영을 열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영적인 귀가 열려야만 주님의 말씀이 생명력 있게 내 안에 들어오고, 날 선 검과 같이 관절과 골수를 쪼갭니다. 반대로 육적으로 말씀을 받으면, 아무리 귀한 말씀을 많이 들어도 그저 졸립기만 하고 도무지 못 알아들을 소리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때문에 우리는 늘 ‘주님 제게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을 열어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자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나온 살아있는 떡이니, 내 살과 피를 먹어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육적으로만 받아들여 ‘너무 어렵다’고 투덜대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떠난 사람들은 바로 그때까지 주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지요.

(요 6:51-53)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문자적이고 육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6:68)”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영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 스스로가 하늘에서 온 만나이시며,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을 물론 알고 계셨습니다. 이미 주님이 오시기 오래 전부터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을 것이다’는 말씀이 계시되어 왔고, 오늘 본문의 처음부분 에서도 메시야가 실제로 이 땅에 오셨으되, 믿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 분이 걸림돌이 되어 다 넘어지게 되어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 곧 시온성의 바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온전해 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다 비유로만 이야기하셨던 까닭은 ‘알아들을 수 있는 자만 알아들으라’는 의도 때문이었지요.

 

지금 이 시대도 주님이 계시던 때와 비교하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은혜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은혜의 홍수 시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을 믿으라는 소리가 어디서든 들립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사람들은 복음의 어마어마한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이 흘리는 땀과 피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계시건만, 사람들은 그 귀함을 모르고 그저 흔하디 흔한 이야기 정도로 복음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은혜의 때가 끝나면 이어 심판의 때가 열린다고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믿는다는 자 안에서도 온전히 믿지 않은 채 ‘불순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도 자꾸 넘어집니다.

 

 

2. 놀라운 우리의 자화상

 

 

택함 받은 사람들인 우리는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 9절을 보면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왕은 통치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신분을 바뀌어주셨으므로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통치자의 반열’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이 신분상의 변화를 우리가 아주 즉시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 모두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마태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말씀에서 보듯이 우리가 받은 권세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가난의 저주는 떠나라’ 저주에 대해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마귀가 명령에 굴복하여 떠나야 할 정도의 권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세는 물질계와 영계 모두를 다스릴 수 있는 왕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자화상은 기본적으로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막상 지금 이 순간에도 ‘정말 그래?’하면서 잘 믿기지 않을지라도 나의 자화상을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깨달으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자화상을 찾지 못한다면, 마귀는 하루에도 수천 번 씩 우리 눈을 흐리게 하고, ‘이게 무슨 소리야? 맞는 소리야?’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들어서 다시 똑같은 자리에 주저 않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 진짜 자화상에 맞게 살면, 마귀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로서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본래 자화상에 대한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다리 밑에 살던 거지였는데 주님께서 은혜로서 나의 신분을 ‘왕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겁니다. 헌데 신분은 바뀌었지만 내 자신이 왕자의 품격에 어울리는 행동을 미처 못 배웠고, 예전에 살던 대로 사는 게 편해서 다시 마귀와 손잡고 옛날에 입던 거지 옷을 갈아 입고 다리 밑으로 가서 놀고만 싶다면, 또 왕자가 누릴 권리를 어떻게 발휘하는지 몰라서 그냥 살던 대로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의 ‘신분상승’과 본래의 자화상을 깨닫고, 깨달은 대로 살아나가야 합니다.

 


제사장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백성의 모든 죄를 짐승에 씌워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을 제사장 혼자만 받았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지도 못했습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도 말과 행동에서 조심하지 않는다면 즉시 죽는 수가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어마어마하게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드리러 들어갈 때는 옷에 긴 줄로 방울을 달아 들어갔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무언가 잘못해서 즉시 죽는다면, 그가 움직이는 방울 소리가 바깥에 들리지 않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제야 그가 죽은 것을 알고 방울 달린 줄을 당겨 죽은 몸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들어가는 길을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무섭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은 원래 소 두 마리가 끌어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과 세상과의 막혀있던 담이 예수님의 십자가로써 한 순간에 허물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은혜를 입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에게 ‘내가 그렇다면 제사장의 언어와 품위를 가지고 살고 있나?’ 하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자화상을 깨닫지 못하게 여러 가지로 방해를 합니다.

아까 왕자의 예와 마찬가지로 다른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잘 살게 하려고 생전에 건물을 몇 채 사놨는데, 그 사실을 나만 모르고 ‘나는 거지인가보다’하고 평생 다리 밑에서 사는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유산은 찾아서 내 것으로 당당하게 써야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유산이 있는 줄도 모르게 가리 우고, 유산을 찾아서 제대로 쓰지 못하게 가리 웁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해 주신 놀라운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것조차 우리는 잘 모르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도 9절의 말씀은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치 이름표처럼 우리 가슴에 한시도 잊지 말고 달고 다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요 주님의 은혜로 새로 부여받은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우리의 빚을 다 갚아주셨고, 나아가 물질계와 영계를 다스릴 수 있는 큰 권한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의 자화상을 찾아서 그대로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3. 주님께 충성된 삶으로 바뀌어 나감

 

 

이러한 놀라운 신분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우리의 삶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1절 말씀에는 선을 행하면서 부당한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 자화상이 실로 대단하고 어마어마하게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일은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내가 실제로 걷는 것 뿐입니다. 이는 곧, ‘다시는 전에 살던 그 집’에 가지 않는 삶입니다. 왕자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은 다리 밑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러한 삶에는 예의범절이나 절제가 전혀 없으니 살기에는 편하겠지요. 어차피 방종에 빠진 삶이니 몸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왕자가 되면 ‘왕자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라면 또 얼마나 고귀하겠습니까. 심지어 천사들을 시켜 인간인 우리의 시중을 들게 하셨다는 말씀도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이 흠모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을 이는 천사가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3장 말씀에는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나게 고귀하게 신분을 당신의 은혜로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자녀답게, 예수님의 신부답게 완전히 변할 때 마귀들은 영향력을 못 미치고 그 자화상에 합치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말로만 예수님 신부라고 하면서 실제 삶은 세상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면, 오히려 ‘내’가 마귀를 꼭 붙잡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내 삶이 바뀌는 데에는 내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 그 외형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새의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러 왔을 때, 그는 주님께서 택하신 자가 다윗인 줄 처음에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잘 생기고 풍채 좋은 큰 형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그가 아니다’라고 하셨지요. 계속해서 아래 형제로 내려가, 거기 있던 일곱 형제 모두에게 주님께서는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또 다른 아들이 없냐?’고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어보자, 목동인 막내 다윗이 불려 왔습니다. 주님께서 기름 부으시고자 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삼상 16:7)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다윗에게 보신 건 형들처럼 출중한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시는 것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심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온전하게 주님만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람이라면 최소한 나의 내면, 내 영혼이 깨끗하고 충성되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주님께 충성을 다 바쳤던 사람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이 대표적으로 꼽힙니다. 갈렙은 우리말로 ‘개’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정도로 매우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 충성된 사람은 한시도 쉬지 않고 늘 이분의 명령이 무엇인가, 이 분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지금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왕이며 나의 신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신랑에게 밥을 차려줄 때도 ‘이 사람이 무슨 반찬을 좋아할까?’하고 일일이 기뻐하며 맞춰주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주님이 무엇을 좋아하실까?’하고 늘 초점이 주님께 맞춰져 있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에 우리가 내 마음의 중심에 이 분을 잘 모시고 섬길수록, 내 심령이 전심을 다해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수록 나에게서는 저절로 주님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기도가 엄청나게 중요하긴 하지만, 이렇게 삶 자체가 온전히 바뀌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하나’라고 할 정도로 너무나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만 주님을 ‘신랑’이라고 해놓고, ‘주님은 주님이고, 내 삶은 내가 살아야지’ 한다면 주님과 무슨 통화가 되겠습니까. 주님과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온전한 신랑, 신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만 ‘주님 권세 내 권세’가 유효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관계에 들어와 있는 사람과 적당한 신앙생활만 유지하려는 사람과는 주일을 지키는 데에도 아주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교회에 출석만 한다면 그들은 마지못해 오는 것이지요. 주일을 열심히 지켜야한다고는 하는데, 와도 별로 즐겁지가 않고 의무감만 남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동기로 교회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처음부터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올 수야 없겠지요. 그러나 동기는 각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안에 들어왔다면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각자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며 찾아내야만 합니다.

 

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저 같은 사람은 중매쟁이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도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중신 하는 사람의 목적은 신랑과 신부가 제대로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저 멀리 떨어져서 막연하게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내 몸 안에 내가 들어와 있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 그분의 진액을 받는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충성되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나가야 합니다.

 

 

4.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삶

 

 

주님을 만나서 그분과 함께 사는 길이란 내 심장이 주님을 향하고 있는 한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복음이 넘쳐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을 깊이 깨닫지 못한 채 주님의 살과 피를 제대로 못 먹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님께서 실질적으로 내 삶에 역사하는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주님은 언제까지나 ‘막연한 소문’ 안에 계신 분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으로는 내 신앙의 그림이 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허나 말씀을 보면 다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영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요한1서 2장 27절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시며 스승이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한 점 한 획도 빠지지 않고 묵상하며 읽으면 주님께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하나 깨닫고, 감동하고, 때에 따라 회개의 영을 불어 넣어주시고, 누구를 만나게도 하시고, 무언가 생각나게도 하시는 등 우리 삶 전체를 주님 주관으로 이끌어 나가시기 시작합니다.

(요일 1: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운전대를 잡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할 거다, 내가 할 거다’ 하면, 성령님도 결국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핏 값으로 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겠습니까?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이 땅에서도 나랑 함께 살자꾸나. 너는 어린아이라서 혼자서 거룩하게 될 수가 없어. 내가 지켜줘야 해’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 구석구석을 살피시고 돌보시고 당신의 선한 뜻에 따라 인도하시고자 합니다.

 

어떻게 어린애가 태어나자마자 저 혼자 기저귀를 갈고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나를 온전히 내 맡긴 채 그 분이 지시하는 것을 믿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는 하늘나라를 갈래야 절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손으로 만든 작동도 안하는 내비게이션을 안내자로 삼아 천국에 가겠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계시를 직접 받으시는 성도 분들도 계시지만, 내가 아직 계시를 못 받는다 해도 이미 말씀은 항상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말씀을 내 취향에 따라 자르는 일 없이, 모두 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는 대로 행하면서 살면 그 길이 내비게이션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안에서 바위에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구원의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도자를 따르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역자도 똑같이 그들 안에 성령님이 있으며 그 직분을 맡은 것뿐입니다. 그들이나 여러분이나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지도자는 단지 내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걸 알려줄 뿐입니다. 나와 주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방법도 어디 어려운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어렵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장에 주님께서는 문 밖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마음의 문만 열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계 3:20)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 영성원에서 은혜를 받으시면서 몸소 느끼시는 분들이 이미 많이 계십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내 모든 존재가 설레어 격동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은혜를 받는 성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몸부림을 치며 너무나도 기뻐합니다. 나도 몰랐던 내 영혼이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짓눌려 있던 영혼에 주님의 영이 임재하시니, 마치 오랜 가뭄에 좍좍 갈라져 있던 땅에 단비가 내린 것 마냥 영혼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겁니다. 그 순간 내 영혼은 너무나도 애절하게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영혼의 단비를 맞아 기뻐 춤추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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