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자연계를 복종시키고 창조하신 주님 (막 4:35-41)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0-12-17
조회수 2161

 

자연계를 복종시키고 창조하신 주님 (막 4:35-41)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우리 신앙인은 현실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그냥 이 땅의 문화와 법칙을 따르며 삽니다. 우리도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다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왔고, 영의 세계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이후의 삶은 현실적인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기, 이 두 가지 역할을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만약 중심에서부터 신앙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라면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가 종종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 모두 우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깨닫고, 다시금 믿음을 확고히 다지시길 바랍니다.

 

 

 

1. 예수님께서 주무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땅으로 가자’고 하시며 거라사 지방으로 향하십니다. 그곳에는 쇠고랑을 끊을 정도로 강한 귀신에 들린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이 이방지역에 가셔서 그를 회복시키고 복음을 전해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가는 동안의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 주여’ 하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셨으며,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인해 ‘나라는 존재’를 다 없애고, 내 삶 전체를 이분께 드렸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된 이상, 이 분의 말씀은 틀림없이 성취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외롭게 만들고 세속적인 이야기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한쪽에서 고물을 베고 주무셨습니다. 영적인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거나,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늘나라 복음을 꿀 송이처럼 받아들이며 더 듣고 싶어 했다면, 아마 주님도 함께 이야기하셨을 테고, 본문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헌데 풍랑이 왜 갑자기 들이 닥쳤을까요? 자기들끼리는 세속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이들의 이야기가 듣기 싫으셔서 한쪽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도 진짜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저희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예수님이 주무셨을 겁니다.

한편, 예수님이 주무신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비추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니 네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내가 들어 간단다’ 하시는 분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사실 주님은 전능자이시기에 당신이 원하기만 하신다면 우리를 억지로 장악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까닭은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서 보시고, 항상 인격적으로 존중하시며 우리를 온전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주님 앞으로 오기를 바라십니다.

성령님과 악령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령은 초청하지 않아도 우리를 장악하고, 나가라고 해도 버티면서 안 나갑니다. 그러나 내가 은혜를 받고 있다가도 ‘전화를 받아야겠다. 아! 일을 좀 해야겠다’ 하고 마음을 그리로 기울이면, 성령님께서는 즉시 역사를 중지 시키십니다. 반면 악령은 성령님의 권능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발작을 하고, 인간의 지정의로 제어하지 못하게 아주 기승을 부립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느냐 아니냐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신앙 안에서 놀라운 영의 세계를 영접하여 기뻐 뛰다가도, ‘다시’ 세속을 향해 나갈 때도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던 것입니다.

헌데 예수님께서 주무시면 우리 인생에 환란이 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간다고 모든 것이 아무 문제없이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라고 하셔서 그 명령을 온전히 따라갈 때도 환란과 풍파가 오는 경우가 있지만, 주님과 동행하지 못할 때에는 반드시 환란이 옵니다. 즉 환란은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실 때 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광풍이 왔다는 것은 환경 속에서 마귀 역사 했을 때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사업체가 부도가 나기 일보 직전이거나 중병으로 죽음 문턱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여기서 세상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의 지혜와 경륜으로 역경을 헤쳐 나가겠지만, 믿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아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즉 위험에 처했을 때할 때,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자격을 가졌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비록 주님을 고립시키고 저들끼리 이야기하다가 풍랑을 만났지만, 그들은 이미 주님을 영접한 제자이기에 두려움이 닥쳤을 때 곧바로 ‘주여’ 하고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의 삶과 참 비슷하지 않습니까?

 

 

 

2. ‘믿음의 은사’(고전12장)를 플러스로 사용하라

 

 


이때 예수님께서 깨어 명령하시길, ‘잠잠하여라’ 하자, 바로 그때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믿음이 적었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원래 믿음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 중의 하나로 우리가 이미 선물로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우리가 복음과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미 그 은사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미 성도가 된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건 맞지가 않습니다. 다만 각자의 달란트마다 그 믿음의 분량이 다를 뿐 믿음은 이미 모두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질책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이 믿음을 플러스로 긍정적으로 쓰느냐 아니면 자기가 받은 믿음을 마이너스로 갉아 먹느냐에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플러스로 우리가 믿음을 쓰면 어마어마한 기적이 임할 것이며, 마이너스일 때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에서 담대한 믿음은 상급이 크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는 뒤로 물러서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모든 성도가 다 믿음의 씨앗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고히 정립이 되지 않았고, 또 영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자들조차 풍랑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자연이 무엇이기에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그 자연을 창조하신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데도 풍랑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시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 모든 우주를 창조했음을 네가 믿는다면, 왜 풍랑이 이는 바다를 두려워하느냐. 안 믿었으니까 두려운 게 아니겠느냐. 능히 내가 구원할 것을 못 믿으니 두려운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현실과 사실 항상 반대입니다. 현실이 편안하고 잘 지내질 때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정말로 어떠한 믿음을 가졌느냐가 드러날 때는 환란과 고통이 닥쳤을 때입니다. 예컨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집안 문제가 닥쳤을 때, 그가 가진 믿음이 진짜 반석위에 선 믿음이냐가 밝혀지는 것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플러스의 믿음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으로는 현실 속에 신앙을 굳게 뿌리내리기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을 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허다한 ‘론, 관’ 은 단지 추상적인 이론일 뿐, 이를 통해서는 영이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적으로 만난 신앙은 이들과 전혀 다릅니다. 말로는 표현치 못하는 주님과 나의 신뢰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킬 때 주님과 나의 신뢰 관계, 영적 만남은 더 깊게깊게 들어갑니다.

 

백부장의 믿음(마 8:5-13)이 이러한 믿음입니다. 이 사람은 유다 지역을 통치하던 로마 점령군의 사령관이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주님께서 ‘내가 가서 네 종을 고쳐주겠다’고 하셨을 때, ‘어찌 제가 감히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냥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제 종이 나을 줄을 믿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모든 영계와 물질계가 복종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큰 믿음으로 그는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직접 가서 무슨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이 자리에서 그가 나을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신앙은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신학적으로도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주님 영의 인도를 받을 때에만 영적 세계에 접근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신학적 지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제일 먼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만나야했겠지요. 하지만 주님은 이런 면에서도 아주 공평하신 것 같습니다.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나 학교를 한 번도 다니지 않은 사람이나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 현실 세계를 살아가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주옥같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 약속들을 ‘모두 다’ 믿는 것입니다. 내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왜요? 왜요?’하면서 이성적으로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한다면, 그 약속들을 하나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활, 먹고 사는 문제 역시 ‘다 내가 돌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먹고 사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부터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새와 들꽃을 가리키시면서 ‘저 새가 농사도 안 짓고 창고도 없는데, 아버지께서 먹여 살리시지 않느냐. 또 들국화를 봐라. 길쌈을 하지도 않는데 저렇게 입히시지 않느냐. 너희들은 저 동물보다 식물보다 더 귀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너희들을 안 입히겠느냐. 만약에 너희들이 먹고 마시는 걸 걱정하면 너희들은 이방인이나 다름없단다.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걱정’ 은 안 믿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하늘로부터 온다’는 걸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다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이것을 의지하고 바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런데도 내심 우리는 믿음 안에서도 ‘그런 게 어디 있어? 너무 터무니없잖아’ 라고 말씀과 생활을 분리시키는 경우가 여전히 많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이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치유사역을 하다보면 기도를 받는 사람과 그 사람의 환경이 점점 좋아집니다. 그러면 사역자도 사역을 받는 사람도 할렐루야입니다. 그런데 사역을 받는 사람들 중에 20퍼센트 정도는 상태가 좋아지다가도 갑자기 곤두박질치면서 더 악화 되어 버립니다. 기도도 받고, 본인도 열심히 했는데도 나빠지면, 누구나 당황하고 힘들어집니다. 마치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인 곳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 이유도 사실은 환란과 믿음의 문제에 관련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복을 청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복만 달라고 매달립니다. 하늘나라가 내 삶에 임하는 건 좋은데, 단 현실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 복 받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서 받고 싶다고 염원합니다.

헌데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 ‘너는 먼저 현실을 다 내려놓고, 180도로 삶과 생각이 바뀌어야 나를 만난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영적인 곳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지금까지 현실을 살아온 척도 내에서 이해가 되는 신앙생활을 말해야 별 무리 가 없고, 그러한 교회에는 사람이 잘 모입니다.

 

실상 믿음이란 영이 열려도 지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영으로 주님을 만나도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고, 영적인 놀라운 세계에 접근하기가 어려운데, 영적인 데에 전혀 무지할뿐더러 거부를 하고 있다면 주님을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신앙인들조차도 ‘지금 이 현실에서 나가면 모두 돈인데, 무조건 믿음, 믿음 이라니 참 답답한 소리들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요지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

(마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 의심치 말고 믿으라

 

 

‘나의 믿음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각자 이 질문을 하며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가 온전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그 말에 따라 역사해주십니다. 그 한마디에 주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주님을 만났느냐 만나지 못 했느냐도 그 자체만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없으며, 만난 후에 ‘지금’ 내가 매일 매일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승리하느냐 망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정말 내 삶에 적용시키는 건 만만하고 쉬운 게 아닙니다. 특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진짜로 ‘아멘’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습니다.‘이 자리에서 내가 몇 발자국 걸어가면 저 자리에 이르겠다’는 당연한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경에 나온 무수한 기적들-태양이 정지되고, 홍해가 갈라진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주와 천하 만물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걸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정말 믿어지십니까?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치시면서, 이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 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원동력 없이는 하늘나라를 끌어들일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9가지 은사 중 8가지 은사는 외부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은사는 외부로 표출이 안 됩니다. 자기 혼자만 압니다. 누가 아무리 뒤흔들어도, 상황이 어떻게 급변하여도 그냥 나는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외 나머지 8개의 은사에 믿음이라는 바탕이 견고하지 않으면, 이 은사들이 발휘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치유사역자가 치유 기를 할 때에, 믿음이 든든하지 않다면 악령은 그 순간에도 ‘네가 뭔데 기도를 하느냐, 이러다가 큰일 내면 어쩔 건데’하는 마음을 줍니다. 그러면 치유 기도도 못합니다. 또 예언을 할 때에도 악령이 ‘틀리면 네가 책임 질 거냐? 웃긴다’라는 마음을 줄 때에도 무시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믿음이 없으면 예언 사역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은사, 기적과 능력 행함의 바탕은 믿음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계속 믿음, 믿음, 믿음 하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믿음을 지키기가 전혀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주님께 늘 매달립니다. 영적으로 주님을 깊이깊이 만나가도 믿음으로 들어가기 어려운데, 하물며 어설프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대체 주님의 어떤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귀는 하루에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씩 믿음을 갉아먹으려고 의심의 마음을 줍니다.

언제 이걸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보고 기도할 때, 의심의 영이 떠나고 흔들리는 마음이 떠납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심치 않고 믿을 때 그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모든 영적 싸움은 진리의 말씀을 보며 내 것으로 받아 들일 때 승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오셔서 늘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늘 여기 계시지만 그 은혜를 내리실 사람은 믿음을 플러스로 굳건히 지키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현실의 문제 앞에서는 두렵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얘야 내가 너와 함께 걱정하지 말아라’고 하십니다.

 

단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순수하고 긍정적이고 부지런한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건전하고 바르게 살기에 누가 봐도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정말 다르구나’ 할 정도의 깨끗함이 겉으로도 드러날 때, 세상 사람들도 그들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식당을 할 때도 ‘이 음식을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와서 먹을 텐데 어떻게 맛있게 또 건강에도 도움이 되게 만들까?’ 하면서 모든 작은 것 하나 하나에 대해 예수님 영접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그 식당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재료 하나를 사더라도 좋은 것을 사고, 서비스도 아주 정성스럽게 하면, 우선은 원가며 노동력이며 손익계산을 할 때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인정되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이 식당을 알아보고 반응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 때에는 예수님 말씀대로 살았던 ‘바보스러움’이 최후의 승리를 반드시 획득하고야 맙니다.

예수님 말씀을 지키면서, 삶 속에서는 부지런하고 깨끗하고 정직하게, 또 남을 위해 살려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하면 세상 사람들도 크리스찬을 좋아하고, 하나님도 복을 내리십니다. 세상 방법대로 복을 갈구하며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네가 바르게 살면 복은 위로부터 내린다’ 가 주님의 법칙입니다.

 

마지막으로 1967년 중동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 하나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2억의 인구가 6백만 인구의 이스라엘 하나를 놓고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국방부 장관이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미국에 있던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이 성명서를 듣고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미국에 있던 아랍 유학생들은 다들 어디론가 숨었습니다.

전쟁터에 있던 사람도 외국으로 피하는 마당에, 본국으로 속속 돌아가는 이스라엘 학생들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전쟁터로 나가면 죽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시기에 그 곳으로 돌아갑니까? 더군다나 외국에 있으니 굳이 본국으로 갈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러자 젊은이들이 대답하길, “역사가 나중에 나에게 ‘전쟁 중 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어본다면, 당당히 대답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때 6일 동안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에는 ‘공격 앞으로’라는 용어가 없고, 출격 명령이 ‘나를 따르라’라고 합니다. 즉 이 말은 먼저 앞에 나선 사람이 뒤의 사람들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이 정신과 비전을 나의 삶에 적용한다면, 어디에서건 이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불과 물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내 손에서 너를 빼갈 자가 없다, 내 이름을 내 손바닥에 적어 놓았다. 용기가 꺾일 때면 시편91장여호수아 1장을 천천히 읽으며,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반복해서 선포하십시오.

(수 1:5-9)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단 이 말씀들은 주님 중심으로 살며, 주님과 연합된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연합되지 않았다면 이 말씀들도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굳게 연합되어 이 말씀을 믿고 나가면 주님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현 세대에 우리 각자는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적당히 살다가 인생을 끝낼 것인지, 민족과 세계가 믿음을 잃은 채 세속화 되어가고, 하나님과 만나지도 못하는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전도자의 역할을 할 것인지 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추수꾼으로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가 편안한 신앙생활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따를 때,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육신의 걱정에 마음을 쓰지 말고 영의 세계만을 바라보면, 믿음으로 모든 일에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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