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의 심령 (눅 15:11-24)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0-12-08
조회수 2285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의 심령 (눅 15:11-32)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 삶의 전도

 

 

예전 우리나라에 고재봉이라는 살인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열여섯이나 죽였고, 교도소에서도 악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한 복음 전도자가 그에게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그때까지 사랑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고재봉은 이 말을 곱씹고 곱씹다가 주님 영접하고, 죽는 날에도 주님을 찬양하며 죽었습니다. 이 한 사람이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그 교도소에 2천 명 중 1600명이 ‘고재봉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나도 하겠다’면서 주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가 말하는 것은 “삶의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주님의 은혜를 받고서, 은혜로 말미암아 삶이 실제로 바뀌면 굳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아도, 사람들 쪽에서 먼저 ‘무엇 때문에 저이의 삶이 바뀌고 형통할까?’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내 삶이 바뀌면 우리의 삶 자체로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먼 데부터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내가 주님을 진짜 좋은 걸 깨닫고 나면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전도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을 영접하고 보면 서로 ‘내가 만난 주님’을 나누느라 바쁠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심령

 

이제 본문의 말씀을 봅시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 전에 예수님께서는 두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비유가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성한 양 아흔 아홉 마리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등불을 켜고 집을 샅샅이 뒤졌다는 앞의 비유는 오늘 본문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잘 접근하면, 복음의 핵심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일체가 되었다면, 그분과 하나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나도 일체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내가 아버지의 마음과 복음의 핵심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면, 복음을 남에게 전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영적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복음을 맛보고 나서도 세상으로 다시 떠난 사람, 복음의 맛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둘 다에 해당됩니다.

‘허랑방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 세상 것에 취해서 사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잘 놀고 잘 사는 것이 세상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헌데 복음을 모르는 세상 사람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조차도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성 없이 부와 명예, 또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부, 명예, 권력은 결국 ‘세상의 것’ 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법과 결코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나를 썩게 만듭니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 일서 말씀에 보면 이 세상 것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믿는 자들 역시 여전히 이 세상 것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또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세상에서 허랑방탕하며 죄 지으며 사는 것이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이는 한걸음 한걸음 마다 자기 영혼을 파멸시키고 자기 살을 파먹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설령 못되게 하고 떠났지만, 날마다 동구 밖에서 서서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할퀴고 떠났건만 ‘오늘은 이놈이 왔나?’하고 날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 아버지의 심령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온전히 아버지 품속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마귀의 통제 아래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반대로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들어와 있으면 마귀는 우리를 넘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신 품으로 들어오지 못한 자녀들을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눈은 그리도 안타까운 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아들 딸들이 마귀의 통제 아래 있으면 파멸될 수밖에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나의 이 아이들이 언제나 내 안으로 들어올까’를 매일 기다리시는 겁니다.

 

 

둘째 아들은 정확히 말하면 교회 생활을 하되 그 믿음 생활이 온전하지 못한 이들에 더욱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전도의 대상은 교회 바깥사람들 보다는, 교회 안에서 들어왔지만 진짜로 주님을 만나지는 못한 사람들이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이들은 일단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며, 집 나간 둘째 아들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실 착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으니 안심이며 나는 제대로 믿고 있다’고 스스로 되뇌지만, 아버지 집 안의 풍성함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 안에 머물러 있으면 환란과 곤궁이 없는 것이 정상이며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나라는 저기 먼 곳에 있는 어떤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적 개념이기 때문에, 아버지 뜻 안에 순종하면 바로 ‘여기’가 하늘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도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아버지 집에 온전하게 들어온다면 모든 것이 형통하며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믿음 생활 안에서도 마귀의 방법을 여전히 고수하며 산다면 여전히 저주가 남아있으며, 이 상황은 본문 말씀에서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그 조차 먹지 못하는’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3. 아버지의 마음과 방법으로 아버지의 일을 하라

 

다른 한편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내’가 중심이 되어 내 맘대로 일을 이끌어나가는 순간, 이 역시 주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본문에서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날이면 날마다 둘째 아들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랬으며,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령입니다. 그런데 형은 어땠습니까?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았는데,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분을 내며 율법적으로 살던 자신을 내세웁니다.

우리도 간혹 형과 같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율법의 잣대를 우리 인간에게 갖다 대면 아무도 살아남을 자가 없건만, 우리는 수많은 잃어버린 이들에 대하여 자주 ‘사랑의 안경’이 아니라 ‘율법의 안경’을 끼고 대합니다.

율법은 그저 죄를 알려주는 자이고 거울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방법으로, 아버지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곧 성령 충만입니다. 만약에 아버지 일을 하면서도 ‘내 방법’으로 하고 싶다면, 거기에는 ‘자기 의 ’가 들어가고 맙니다. 그 다음에는 정작 아버지를 향한 마음을 잃어버린 채, 주님 일을 하면서도 부, 명예, 권력 등을 잡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옮아가기 쉽습니다.

 

아버지의 방법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지니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 자체의 힘, 긍휼의 힘이 우리에게 들어 차오를 때 영적 능력은 나오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나옵니다.

이러한 힘이 사실 우리에게는 크게 부족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주위의 누가 잘되었다고 하면, 얼른 축복하는 말이 자동으로 나오기 보다는 ‘그래?’하면서 배가 살살 아픕니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요, 울타리 안에 있는 여우입니다. 이러한 어둠들은 성령의 불과 기름부음, 생수로 씻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점점 우리 자신이 진실로 바뀝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방법대로만 바르고 자비롭게 살고 싶어집니다.

 


자 이제 탕자가 돌아오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아버지에게 종도 아니고 일당 잡부로 써달라고 할 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놀랍게도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아들을 제일 좋은 새 옷으로 갈아입혔으며,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끼워주는 반지는 확고한 신분을 재확인 시켜준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그가 돌아온 즉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격을 갖추게끔 만들어주신 겁니다.

내가 비록 그러한 격상을 바라고 돌아온 것이 아니더라도, 아버지 품으로 제대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해주십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면 모두가 다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또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게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먼저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가 이 잃어버린 ‘아들들’을 얼마나 가슴 저려하면서 기다리고 계신지를 아버지 마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정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시고 계십니다.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로 하늘나라를 알려주셨는데, 우리가 그 놀라운 은혜를 찾아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즉 아버지의 통치 아래에 있는 삶은 이생에서도 눈물과 해함, 좌절과 낙심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아버지의 집에 온전히 돌아와 온갖 저주가 그 안에서 풀린 다음에는 해야 할 일이 오직 하나입니다. 즉 하늘나라를 이해하고 영으로 아버지를 만나 그분과 일체가 된 다음에는, 우리도 사도들과 똑같이 스스로 하늘나라 복음을 위한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16절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의 핵심과 아버지 나라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축복을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복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반드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잃어버린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내가 할 것이 무언가? 를 스스로 질문했겠지요. 그래서 목숨을 내걸고 이방 전도 여행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고전 9:16-18)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똑같이 이야기하십니다. 첫째는 하늘나라를 정확하게 깨달아라. 아버지 품에 온전히 들어와라. 그리고 그 안에서 저주가 풀리는 것을 경험하여라. 둘째는 내가 맛본 주님의 통치를 세상에 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해야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많은 숫자보다도 아버지의 나라를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며, 만 명 보다는 진짜 용사 한명이 태어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 한명이 세상을 뒤집은 것처럼, 진짜 용사 한명 한명이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성도 분들도 다 이런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며 일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줄로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직분을 내세우며 바리새인 서기관처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한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듯이(고전 9:19-23),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구원 의 참 인도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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