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구원 속의 치유 (사 53:1-6)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0-12-06
조회수 2522

 

구원 속의 치유 (사 53:1-6)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신 메시아 예수님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환시로 본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성부 아버지께서 친히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며,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시리라는 것을 계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환시 속에서 보니,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도무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을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마구간 구유에서 탄생하시고, 작은 어촌에서 목수 일을 하시는 것도 ‘왕 중의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로마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거나, 천군 천사와 더불어 하늘로부터 빛 안에 위엄을 갖추시고 오신다면 모르겠는데, 그와는 정 반대로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이었던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계시를 환시로 받았다는 것은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라 내가 전하는 걸 누가 믿으랴. 그분에게는 고운 것이 하나도 없고, 마치 땅 속에서 겨우 솟아나오는 연한 순 같구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정말 볼품없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영으로 보는 분들은 예수님의 얼굴이 아주 잘생겼다는 것을 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부분은 예수님의 육신적 얼굴이 아니라 환경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어 지는 구절에는 주님께서 이 땅에 육을 취하여 오신 까닭이 나옵니다. 본문 4절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실로’는 정말로, 진짜로, 실질적으로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당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지어 징벌 받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나무에 매달리는 자마다 저주 받는다’ 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저주받은 자가 되시어 나무에 매달리셨으니, 이는 진짜 우리의 병고, 즉 병마의 저주를 지고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연약해서 도저히 담당할 수 없는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에 당신의 피로 속량하셨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2. 전인적인 구원 : 병치유와 메시아 구원사역의 관계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영원히 살아있는 권능의 말씀입니다. 반면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병 치유와 구원 사역을 별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빌라도 법정에서 39대의 매를 살이 온통 찢어지고, 심지어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맞으셨던 까닭은 ‘그 맞으심’으로써 우리의 병마 저주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저주는 원칙적으로 완전히 풀린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던 그때에 성부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진노의 잔을 예수님께 부으셨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며, 이 땅에서도 즐겁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 구원을 받고, 주님의 사람이 된 이상 우리는 이제는 이 땅에서도 가난하면 안 되고, 병을 앓아도 안 되는 것이 마땅한 순서입니다. 왜냐면 갈라디아서 3장 13-14절 말씀대로 이 분이 이미 우리의 저주를 다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도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복음 말씀을 그저 막연히 ‘잘 믿으면 죽은 후에 천국 간다더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복음과 구원의 핵심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 심판 날에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만 구원은 아닙니다. 사후 영혼의 구원도 구원이지만, 예수님이 내 삶에 오신 후에 이루어진 구원이란 삶 전체의 모든 저주가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한 개인 뿐만이 아니라 인간사 전체의 모든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전인적인 구원을 하러 오셨습니다.

 

 

또 죄의 용서와 병이 나음이 왜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도 잘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과 죄의 용서, 병마의 저주가 떠나는 것과는 서로 상통합니다. 이는 마가복음 2장부터 나오는 중풍병자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시자 이 분이 머무시는 집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때 중풍병자 한 사람을 그의 친구 네 명이 들 것에 싣고 옵니다. 다윗의 후손이 모든 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친구들은 결심을 합니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이 친구가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겠다, 그래서 이 친구의 병이 고침 받도록 해야겠다.’ 참으로 대단한 친구들입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 라도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기로 결심한 그들은 들 것들 메고 지붕 위로 올라가 그 지붕을 뜯기 시작합니다.

 

한편 바로 아래에는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계셨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붕은 흙으로 얄팍하게 덮여 있기 때문에, 지붕을 뜯으면 그 부서진 것들이 아래로 그대로 떨어집니다. 그들이 지붕을 뚫고 내려오기까지 예수님은 기다리셨고, 주님의 눈에 그들은 참 대견해 보였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정말 구세주이신 당신을 믿고, 기어코 만나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주님 눈에 예뻐 보였겠습니까.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막 2:5) 그러자 거기에 있던 서기관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죄는 하나님만이 사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

       (막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는 왜 이 사람의 병을 그냥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을까요? 바로 죄 사함과 병 고침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병마의 자리에 가난, 사업의 망함, 집안 문제 등 온갖 저주를 집어넣고도 똑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저주는 죄의 대가로 들어왔으며, 병 역시 그 저주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는다면 병마는 저절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법칙입니다.

 

허나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성도들이 이 법칙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일면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두 가지 기적을 행하고, 사후의 구원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저주’를 짊어지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이는 곧 전인적인 구원을 이미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전하게 주님과 일체가 되어서 저주가 떠난 자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꾸어주는 자, 머리가 되는 자,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회복된 사람은 이제 스스로 주님께서 지고 가셨던 것과 똑같은 멍에를 지고서 주님의 일을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온전하게 일치가 된 사람도 세상에서 고난을 겪지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이전처럼 저주 때문에 마귀에게 끌려 다니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주님 가신 길을 가면서 겪는 고난입니다.

 

 

3.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

 

원칙대로 말하자면, 저주란 우리가 예수님 영접할 당시에 모두 풀리는 게 맞습니다. 마귀는 주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어야 마땅한데, 다만 그들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불법적으로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 온전히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과 병마 등 저주에 여전히 짓눌려 있고, 주님과 통화가 안 되고 계속해서 시달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음에도 마귀들이 모두 쫓겨나지 않는 이유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육의 사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회개가 덜 되었고, 세상 것으로 채워져 있던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끗하지 않은 상태라면 마귀에게 떠나지 않을 빌미를 줍니다.

 

두 번째로 마태복음 11장 12절의 말씀에 나와 있듯 ‘하늘나라는 거저 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세례 요한의 대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즉 우리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마귀들이 모두 무장해제가 되었고, 법률적으로도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대들면 안 되지만, 아주 끈질기게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떠나지 않는 마귀들은 기도와 단식으로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4. 치유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 하신 목적은 우리 인간의 모든 저주를 풀어주시고 전인적 구원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온갖 저주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가 병마에 시달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도 말씀하시길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야훼 라파, 곧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방법과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상처도 하나 없이 모두 고쳐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5장21-28절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의 사건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청을 야박하게 거절하시면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고 말씀 하셨지요? 그 말씀은 사실 이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고자 하신 것이었고,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했기에 주님의 칭찬을 들었고, 귀신들린 딸도 그 여인의 그 말로 인하여 치유 받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가만히 보면, 마귀에게서 해방되고 병마에서 치유되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밥 먹듯이’ 경험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자녀의 떡’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정작 우리는 주님의 권능으로 마땅히 받아야 하는 치유를 마치 먼 산 보듯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듯이 여깁니다. 심지어는 치유 받는 것과 복 받는 것을 별개로 치거나, 치유와 구원도 별개로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또 다른 사건을 봅시다. 마가복음 1장 40절부터 문둥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 앞에 한 문둥병자가 나와서 말하길, ‘당신께서 원하시거든 저를 고쳐주세요’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문둥병자란 저주를 받은 자로 완전히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 자신도 ‘내가 평생 저주 안에서 살다가 죽을지, 아니면 저분이 메시아라고 하는데 혹시 나 같은 사람도 치유 받을 수 있는지’ 조차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시면’ 치유해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41절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막 1:40-42)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치유받기를 원하십니다.

 

또 다른 구절을 볼까요? 마태복음 8장 17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이르러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신 분이 이 분 이시라고 합니다. 16절에서 보듯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이 구약에서 예언 되어 왔던 바로 그 메시아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마 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5. 우리도 행해야 할 예수님의 사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할 때, 또 칠십 인의 제자를 파송할 때의 장면을 가만히 그려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과 귀신을 쫓아낼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세상으로 내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여러 말씀에 비추어볼 때, 현재 우리의 신앙은 본질에서 아주 많이 벗어난 것 같습니다. 본질은 예수님의 사역이고, 사도들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본질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났기 때문에, 도대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 바라시는 삶인지 도무제 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본질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을 오히려 학문이 모자라고, 무식하고 과격한 사람들로 오해할 정도로 복음의 핵심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이 세대의 정서가 그렇게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행하고 선포하고 나갈 때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그 외에 아무리 학문적이고 지식적인 여러 가지를 덧붙여 봤자,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곳에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치유 받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말씀 하나로만도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의 말씀, 이사야서 53장을 계속해서 선포해 보십시오. ‘나는 나아야 한다. 낫는 것이 당연하다. 주님께서 나는 이미 나았다고 하셨다. 나았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저 입으로만 선포하는 것 같지만, 끈기 있게 계속해서 선포하면 이것이 진짜로 믿어지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나를 잡고 있던 악한 영은 이 말씀에 의해서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또 실제로 이를 체험해야 합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우리 성도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사는 것, 병마에 짓눌려 있는 것을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며, 부자로 사는 건 나와 전혀 거리가 이야기로 여기고, 용서에 관해서도 ‘글쎄 내가 이웃을 진짜 용서 한 건가? 아니면 안한 건가?’ 하면서 말씀의 어느 하나도 자신 있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어렴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제가 성도 여러분의 '영혼이 하는 기도'를 왜 통변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나의 기도가 시원찮았건, 강렬한 기도이건 다 듣고 계시다는 것을 깨우쳐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기도를 주님께서는 이미 들으셨고, 쳐다보셨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쳐다보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는 막연히 허공에 메아리치듯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몰라도 이미 주님은 내 안에 오셨고 나를 보셨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진짜로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아 갈 때, 우리 또한 열 두 제자들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를 하고 귀신을 쫓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마태복음 4장 23-24절에 쓰여 있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 본질을 멀리하는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말씀 전체를 아멘으로 받는 사람이 예수님 믿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헌금하라, 희생하라, 사랑하라, 봉사하라’를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해야하듯이 ‘귀신 쫓아라, 병 고쳐라’ 역시 예수님을 영접한 자라면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온전한 복음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살아있는 힘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말씀은 모두 주님의 영감에 의해, 주님의 대언으로 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성경의 한 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하셨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설령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 또 하나 창조하실 수 있을지 몰라도, 말씀은 하나님 자체이시기에 영원하십니다.

또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 뵙게 해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면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복음서에 기재된 모든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아멘으로 받기로 결심하고, 이해가 안 되면 주님께서 깨우쳐 주실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적당한 때에 천국이 있는 것을 우리 앞에 반드시 열어 보여주십니다.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 말씀과 요한일서 2장 27절을 보면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4:25)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내가 지금 말씀을 많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지라도, 지금 이시대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성경 말씀을 내 좁은 이해 틀에 우겨 넣고 멋대로 잘라내면 절대 안 됩니다. 오죽하면 ‘바이블 다이어트’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내가 이해를 못한다고 거부를 하면, 나중에 뭐가 남겠습니까?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재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저 이분의 말씀에 모두 순종하고 따라갈 때 이분이 체험적으로 계시하며 만나주시는 것이 올바른 모습입니다. 그리할 때 내 영혼은 잠시도 헛되이 살 지 않고, 마지막 때의 대추수꾼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변하고, 죽고, 떠났지만 성경은 변함이 없습니다.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지금도 성경에서 본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잘라내고 외면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무서울 정도로 영적입니다. 우리가 더 기도하고,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으면서 성경 말씀으로 직접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과 깨달음을 주실 것이며, 더불어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만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지금 이 자리에서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던 주님을 나날의 삶에서 체험하며 사실 줄로 믿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 분의 구속사에 들어 있으며,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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