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성령님의 시대 (요 14:16-24)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0-12-05
조회수 2518

 

성령님의 시대 (요 14:16-24)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1. 성령님의 시대 : ‘하나님은 영이시니’

 

지금 이 시대는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구약은 야훼 하나님의 시대, 신약은 말씀이 성육신 되신 예수님의 시대, 그리고 현재는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요 4:24), ‘아버지 하나님은 좋지만 성령님은 도무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좋은데 성령님은 어려워서 싫다’ 는 식의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님은 분리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설교’라도 불리 우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십자가 사역을 담당하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오시게 될 보혜사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혜사를 일컬어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다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헤테로스’는 책과 쇠처럼 본질에서부터 그 성분이 전혀 다른 것들을 뜻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알로스’ 역시 우리말로는 ‘다른’으로 번역되지만, 이 말은 물과 얼음처럼 ‘본질은 똑같지만 겉의 형질만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원어로 ‘파라클레토스’ 즉 협조자요 변호사이신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님을 ‘알로스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예수님과 다른 분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시고, 성령님은 영으로 우리 안에 사시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형태만 다를 뿐이지 한 분이십니다. 또한 지금 이 시대에 동일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거처를 우리 안에 정하시고 때로는 어머니처럼, 때로는 스승처럼 아주 부드럽고 자상하게, 또 세밀하게 인도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일단 ‘내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 일을 하는데 가장 먼저 깨달아야할 점은 ‘나는 죽고’, 내 안에 이 성령님께서 들어오시어 ‘이분의 능력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이 열리지 않은 분이 강대상에 올라와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육으로써 신앙을 가르치면 무슨 소용이 있고 은혜가 되겠습니까? 아무 의미 없지요.

그런데 영을 열어주시는 분 또한 하나님 이십니다. 그분이 영을 열어준 사람만이 영적 세계를 보고,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이 주님을 모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더 큰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여전히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영적인 것과 지식적인 것의 긴장에서 한번 논쟁이 붙으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차라리 피하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밖에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바울 사도는 그 시대에 상당히 똑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 2장 첫머리부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가르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 사도가 이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세상의 지식으로 한다면, 그 바탕이 세상의 것이 되어버립니다. 허나 복음은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바탕으로 전해야 합니다. 성령이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전체의 1/4에 걸쳐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겠습니까.

 

 

2. 진정으로 성령에 흠뻑 젖지 못한다면

 

지금은 분명히 성령의 시대입니다. 모두들 ‘성령 충만하라, 기도하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정작 말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에 흠뻑 젖어 예수님과 동행하는 신앙은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니,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충주에서 종종 생명수 사역을 합니다.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사람이 사역을 하면 이 사역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역도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이러한 사역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즉 우리 모두가 일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놀라운 영의 세계로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쳐주신 후 하신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였다면서 그분을 돌로 치려 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이라고 성경에 있지 않느냐’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

   (요 10: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정말 어마 어마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어마 어마한 복음을 아주 작게 축소시켜 이해하는 것이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즉 성경을 읽기는 읽되,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지식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 보려고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그렇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감으로”라고 하신 말씀 뒤에는 ‘내가 아버지께서 가서 성령님을 너희에게 줌으로’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천지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변치 않을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는 사람들이 ‘시끄럽고 유난스럽게 종교생활 할 것 뭐 있냐? 조용히 종교생활하자’라는 식의 말을 합니다. 심지어 ‘그건 그때 그 사건’이라는 말도 자주 들립니다. 왜 그런 말이 떠돌까요? 성령의 불을 일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실제로 나에게 오시게 되면 우리 삶 전체를 확 바꾸어놓으십니다. 전에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었고, 내 본위로 살던 사람에게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 그 즉시 갈라디아서 5장 16-17절 말씀 그대로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자기 욕망을 쫓아 사는 것이 당연했기에 이런 종류의 갈등이라곤 일어나지 않았는데, 주님을 진짜 만나고 나면 싸울 수밖에 없게 됩니다 :

   (갈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진정한 ‘중생’,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옛사람은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여기에 양념처럼 종교성을 조금 집어넣어서 ‘나 자신’을 조금 더 훌륭한 사람으로 리모델링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거듭남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과거를 절단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 위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를 절단한 후에 주님을 영으로 만나고, 거기에 은사를 받아 주님의 능력을 행하는 사람조차도 하루에 ‘수 백 번’씩 마귀들을 만납니다. 하물며 능력도 받지 않은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려는 마귀의 공격은 대단히 집요하고, 우리가 거의 의식을 못하는 틈새에도 5초마다, 7초마다 들어옵니다. 주님과의 일체를 흩트려 놓고, 우리가 세속적인 삶으로 가게끔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이곳의 성도 분들 중에서도 경험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일주일 내내 은혜를 받다가 2~3일만 오지 않아도 바로 기도가 막히고 영이 막힙니다. 그런데 이 막히고 뚫리고를 아는 것 자체가 영이 열린 후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이 조차 전혀 모르는데, 다름 아닌 영적 문둥병 상태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7-9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비밀을 모두 우리에게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즉 계시의 영을 열어주시고 지혜를 주시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을 유업이 무엇인지, 권능으로 행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받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영적인 문둥병 단계를 넘어서서, 주님의 영을 받은 분들도 이미 많습니다. 예를 들면 조금 불도 나오고, 조금 진동도 받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속사람이 영적으로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다면, 마태복음 12장43-45절의 일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빚어지기도 합니다. :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를 못한 사람들이 간혹 마태복음의 이 구절을 들면서 ‘마귀를 쫓으면 더 심한 것이 들어온다고 해서 쫓아내지도 못하겠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성령님으로 인하여 귀신이 쫓겨 가긴 했으되, 내 중심이 아직 주님 중심으로 온전히 채워지지 못하고, 또다시 예전의 세속적인 곳으로 되돌아간 사람의 경우를 가지고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보기에 깨끗한 것과 마귀가 보기에 깨끗한 것은 다릅니다. 귀신이 좋아하는 ‘깨끗함’이란 세속의 영으로 가득차고,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이 이들의 깨끗함입니다.

 

만약 주님의 첫사랑을 받아놓고서도 성령님을 (뒷방 노인처럼) 외면하고, 세속으로 돌아간다면 이때 마귀가 그에게 다시 들어가 견고한 진을 쌓는 건 순식간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자리를 내 안에 가장 좋은 중심에 두고, 사무실로 말하자면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장소를 주님의 자리로 드린다면, 모든 중심이 주님으로 채워지는 사람에게는 일곱 귀신이 절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3. 성령님이 나를 장악해 들어오시게 하라

 

한편 마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 바깥에서 역사하는 마귀가 한 종류이고 사람의 몸 안에 있는 마귀가 또 있습니다. 영의 세계를 조금 아는 사람들조차도 흔히 착각하는 것이 마귀를 ‘한 마리 두 마리’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군대 귀신’이 맞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이 마귀들이 영향을 미치고 또 안에도 들어차 있는데,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몹시도 기분 나빠 합니다. 특히 사람 몸을 장악한 귀신 이야기를 하면 대단히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인간이 얼마나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지 무서울 정도로 깨닫게 됩니다. 이를 두고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 하냐면 에베소서 2장 1절 부터의 말씀, ‘너희는 허물로 다 죽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 인간은 모두 죄로 인하여 아주 새까맸습니다. 누가 더 까맣냐, 누가 덜 까맣냐 에는 도토리 키 재기 만큼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주님이 보시기에 의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주님의 빛이, 성령님이 들어오시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가 그분을 초청하고 환영하며, 이분께 매달리고 매달릴 때 이분은 우리 안에서 커지십니다. 성령님은 빛이시며 동시에 인격체이시기에, 내가 스스로 섬기고 이 분께 복종할 때 나를 장악해 들어오시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분의 음성을 내가 듣는 때는 나라는 육적 사람이 ‘죽을 때’입니다. 원래 성령님은 항상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못 듣는 까닭은 다름 아닌 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예언도 쉽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가 그래야 정상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이며 백성, 자녀이기도 하고 신부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인, 왕, 아버지, 신랑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물론 선지자적 사명은 시대에 대하여 주님의 뜻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이지만, 그 사명이 아니더라도 주님의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가라 서라’ 하시는 말씀 정도는 당연히 들어야 하는 겁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이면 능력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정 반대의 분위기에 빠져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 힘으로는 주님의 일을 못한다. 먼저 권능을 받아라. 사람의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육이 죽을수록 주님의 영이 나를 차지하시게 하여, 주님께서 나를 쓰도록 해야 한다’ 라고 하시는데, 이 시대는 정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신학공부를 하고, 영이 안 열리면 하다못해 심리학이나 목회상담을 해서 양들을 먹이겠다는 마인드가 대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지식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면 나 자신도 못 지킬 뿐만 아니라 가족 역시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며, 주님의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4.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오직 성령님 뿐입니다. 나를 다 내려놓고 이분을 의지할 때, 이분께서 기꺼이 함께 하시고, 우리 삶에 역사하시고, 우리를 주님 만나는 날까지 매순간 인도하십니다. 지식 뿐인 신학에는 역사하시지 않으시며, 무릎을 꿇고 당신 얼굴을 애타게 찾는 이들에게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어린애처럼 간구하면 이 분이 역사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데, 무릎 꿇고 이 분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조금 하다가 잘 안되면 즉시 세상적 방법으로 가버려서 성령님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과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아주 명확하게 나뉩니다. 성령을 따르는 마지막 결과는 생명이지만, 성령님을 내 안에 한번 모셔 놓고도 육신을 따르면 세상의 룰과 법칙 공통분모 따라가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특히 성령님을 모셔놓고도 그분을 가슴 아프게 만들어버리는 일을 우리가 하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에게 똑바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30절 말씀을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하신다고 합니다. 성령님을 내 안에 모셔놓고서도 여전히 육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삶을 살면, 이분은 내 안에서 탄식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님을 탄식하게 할 자격이 있습니까?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이 열려서 성령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지녀야할 필수 요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음이 내리면 선생이 필요 없으며, 당신께서 우리를 친히 가르쳐주신다고 합니다 :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하지만 이 시대에는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욕심으로 인하여 쓰러지고 있습니다. 한번 성령을 받고 감격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다가도, 결국 죄와 사망을 낳는 욕심에 사로잡혀 쓰러져버리고 맙니다 (약 1:15).

저는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세상 모두가 다 썩어도 교회만큼은 썩지 말아야 할 터인데, 바로 교회가 주님의 뜻을 받지 못합니다. 영이 열리지 못해 직접 계시를 받지 못한다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대로 제비뽑기를 해서라도 주님의 응답을 받아야하는데, 그럴만한 의지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계시를 못 받는 이유는 또 근본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방법이 주님의 방법이 아니고, 중심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부터라도 계산기를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방법은 내 계산기를 내려놓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현실적으로 가장 무모하고 바보 같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이를 지키고 순종하고 따라간다면, 지금은 망하고 짓밟히고 손해보고 미련한 것 같지만 이 분 안에서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어, 나중에는 이 분께서 바꾸어주십니다.

 

예언을 받는 사람에게도 몇 십 년의 일을 알려 주시기도 하시지만, 바로 그 직전에만 계시해 주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만나는 비결은 언제나 ‘나라는 존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이 분을 간절하게 찾고, 엎드려 기도할 때 이분의 놀라운 은혜와 은총이 바로 나에게도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9절 말씀에서 보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이 좋은 것입니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땅에서 성령님 인도로 사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약간 이상하고 때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반응이 당연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8장 6-7절, 야고보서 4장 4절 말씀에서도 보듯 우리의 방법이 세상의 룰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 22-23절 말씀처럼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것이 교회입니다. 또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받음을 받은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며 주님의 성전입니다.

구약의 다윗도 주님께 ‘공격을 할까요, 쳐들어갈까요?’ 하고 여쭈어보고 응답을 받은 후 실행하였고, 사도들도 다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러한 관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께서 사도 바울의 길을 막기도 하셨으며, 빌립보에게 ‘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가라’고도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는 되었는데 지금은 주님의 영을 받지 못한다면, 주님을 믿을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닙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창세 전에서 영원까지 동일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자식인데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못 알아들어서 따라가지 못한다면, 이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아 물질 세계와 영계를 다스리며, 주님의 진리로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찾는 사람을 누구든지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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