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때에 맞춰서 응답하시는 주님 (요 11:17-21)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0-12-02
조회수 2348

때에 맞춰 응답하시는 주님 (요 11:17-27)

 

예수께서 나와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

 

 

1.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님과 그 분의 때

 

오늘은 “때에 맞춰서 응답하시는 주님”이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나사로 남매의 집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와 예루살렘을 오가며 수시로 머무시던 곳이었습니다. 이들 남매는 예수님께서 인간적으로도 유독 사랑을 많이 나누시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맏이인 오빠 나사로가 죽을 병에 들었다는 통보가 예수님께 도착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핍박을 피해 유대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계셨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예수님께서 그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갈을 받으시고 즉시 그리로 가신 것이 아니라,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고자 한다면 직접 가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백부장의 하인, 고위 관리의 아들 등을 예수님께서는 그저 말씀 하나만으로 고쳐주신 사건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보통 주님께서 우리 눈 앞에서 직접 만나주셔야만 납득이 되고 주님의 응답도 내가 바라는 방식 대로 즉시 내려져야 만족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편만하게 통치하시는 주님 눈, 우리 물질세계가 그 상위 차원인 영계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이는 ‘주님을 영으로 영접함’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도 어떤 때는 직접 사역하는 것보다 전화로 영적 사역을 할 때 더 효과가 클 때를 경험하곤 합니다. 전화 사역을 할 때는 전심으로 집중을 하게 될뿐더러, 하나님의 능력은 전화상이든, 미국에 있든, 달나라에 있든 아무 상관이 없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늘상 ‘주님을 영접했다’고 하며 그 뜻도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주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가 흠뻑 젖어 살았던 육의 관점과 사고, 즉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서 탈피해서 영적인 관점에서 말씀을 보고 내 삶에서 실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구절 하나하나가 영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육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짜 맞춘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왜곡이 되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 성경 말씀은 주님께서 영을 열어주신 사람에 의해, 오직 영적인 시각으로 깨달아져야 옳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내게 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과거의 육적인 판단기준을 모두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하여 상황을 판단하고 그 중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해 나갑니다. 요컨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실제로 우리 삶에 가져오셨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육적인 관점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통치와 계획을 믿는다는 것은 육적인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계시해주시는 자만 영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7절에서 세례자 요한도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메시야가 아니냐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대단히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메시야가 아니며 메시야를 증거 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듯 영의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주님께서 계시해주시고, 만나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과정을 거치면서 열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에게 강조하셨던 것도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하늘나라의 소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신학적인 지식을 넘치도록 쌓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끝끝내 세상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반면 심령이 가난한 자들,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영혼의 갈급함을 깨닫고 하늘나라를 만나고 싶어 했던 자들은 천국을 만납니다.

 

 

2. 시험에 듦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왔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이미 특별한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네의 시몬이라는 나병 병자도 고치셨고, 그분의 설교를 듣다 보면 은혜가 얼마나 컸던지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오던 이 두 자매는 오빠인 나사로가 죽어가자 예수님께 급히 기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남매들에게로 곧바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계시던 곳에 유하셨습니다.

이제 나흘 째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어 돌무덤에 안치되고 이미 부패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늦어도 완전히 다 늦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이때 마르다는 달려 나와서 예수님께 다소 항변 비슷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실 줄을 아셨지만, 마르다에게는 이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에게 시험이 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얼마나 많은 기적을 맛보았던 마르다입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시험에 들었습니다.

 

이러한 시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쳤던 시험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하실 때, 지금까지 세상에 전무후무한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고 또 지팡이 하나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헌데 민수기 20장을 보면 수많은 어마어마한 기적들을 경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므리바에 이르러 물이 나오지 않자 곧장 모세에게 불평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에게 불평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세에게 “모세야, 우리가 언제 애굽에서 꺼내달라고 했느냐? 왜 여기서 죽게 만드느냐?” 들고 일어나 난리가 납니다.

 

이렇게 시험에 들었을 때 믿음이 흔들리는 모습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 마르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반드시 시험이 옵니다. 그리고 시험은 주님의 영적 세계를 조금도 모르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놀라운 은혜를 만끽한 사람에게 더 위험한 시험이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은혜를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별로 관심을 두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어쨌거나 마귀 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귀에게는 교회를 세우는 사람보다 진정 빛의 사자로 바뀌어 자기들을 밟을 수 있는 영적인 한 사람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일수록 마귀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어 시험에 들고, 실족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3. 주님의 마스터 플랜에 대한 믿음

 

시험에 들 때에는 모든 것을 영원 선상에서 계획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 주님의 때에 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는 믿음이 흔들립니다. 시험에 드는 것과 영의 세계의 관계 역시 매우 긴밀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영이 차차 열려 가면서 계시를 받기 시작하는 시기에 성령과 악령의 계시를 들쑥날쑥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계시 하나 하나에 은사자가 너무나 감동을 한 나머지, 제가 ‘이것은 성령님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차마 지적을 못해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어느새 영성원을 떠나고 맙니다. 마귀의 행위가 그렇게도 간교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마귀가 진짜 예언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때에 ‘영적인 지도자’를 떠나라고 크게 속여 넘깁니다. 시험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곳에서 자주 들어옵니다. 마귀들의 전술도 그만큼 강합니다.

 

마르다 역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상황이 절망적인 나머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채 그만 서운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주님께서 먼저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당연히 살았을 텐데, 늦게 오셔서 오빠가 그만 죽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이 본문의 결말은 어떻게 끝났습니까. 우리 주님이 어떤 주님이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생각까지도 다 꿰뚫고 계십니다. 때문에 주님게서는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우리가 행하게 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계획 안에 다 들어 있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의 때에 맞추어서 역사하십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진짜로 아들을 죽이려는 마음으로 목에 칼을 들이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역사하셨을까요? 만약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순종하지 않고 망설였다면, 숫양이 제물로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그 다음 장면은 성경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뜻에 전적으로 순종했을 때만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마련하셨던 것을 주십니다. 우리 미약한 인간도 자기 자식의 인생을 위해 부족함이 없도록 힘 닿는 한 많은 것을 준비해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인생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다 계획해 두시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개개인에게는 마치 대본처럼 주님의 계획이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본은 우리가 시험을 훌륭히 이겨서 다음 단계로 올라갔을 때,바로 그때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험 들어서 못 올라오면, 그 대본은 거기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의 손에 허락하셨을 때, 욥의 부인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이때 만약 욥이 아내의 말에 호응하여 ‘그래 주님이 해도 너무했어. 이렇게 세게 시험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 하였다면, 그에게 이미 준비되었던 몇 배의 축복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묵묵하게 견뎌내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신앙이 제대로 정립되어 가는 사람을 시험하시고, 동시에 그 사람을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다니엘 5장에는 벨사살 왕이 잔치를 베풀 때 석회벽에 손가락이 날아와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쓴 사건이 나옵니다. 그 뜻은 ‘저울에 달아보니 왕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고, 벨사살 왕은 그 즉시 바로 죽임을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견고하게 성장된다는 점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믿음을 지키는 것이 몇 사람이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려고 장애물을 수없이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장애물을 우리가 통과해서 견고한 진을 파괴할 수 있기까지 믿음이 성장한 용사가 되라고 하십니다.

시험이 들게 되면 우선 기도가 막힙니다. 영이 어느 정도 열리신 분들은 내 기도가 막혔는지 아닌지도 금방 압니다. 그리고 이내 은혜를 받으러 가기가 싫고 귀찮아 집니다. 얼마 전까지 영혼이 그렇게나 뜨거워 춤추고 찬양하고 싶기만 하던 마음이 어느새 다 사라지고 ‘왜 사는가?’하는 허무감, 회의가 들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시험은 앞으로도 우리의 인생에서 계속해서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명심해야할 것 점은 여러분들이 시험의 대상이 될 것 같지 않으면 시험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에게 가신 예수님께서 주님의 때에 더 큰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했음을 기억합시다. 또 오늘의 본문 말씀이 지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그 시련이 닥쳐 시험에 들려고 할 때 실제로 굳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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