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보배로운 질그릇 (고후 4:6-11)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0-11-29
조회수 2498

보배로운 질그릇 (고후 4:6-11)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 단단한 음식을 먹는 신앙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구세주로 믿고 있는 것은 본문 6절에 나오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친히 우리에게 알려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똑똑해서 세상의 ‘무수한 진리들’ 중에서 딱 골라서 예수님을 믿기로 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주님께서 나를 만세 전에 택하셨고, 이 땅에서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로마서 8장30절은 주님께서 4단계에 걸쳐서 우리를 인도하셨음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즉 주님께서는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셨으며, 나아가 나를 당신과 동행하는 삶 가운데 영화롭게 하십니다. 로마서의 이 말씀은 우리의 성장을 요구하는 부분입니다. 믿는 이들은 누구나 주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름 받은 곳에 그대로 머물기만 하는 신앙생활만을 고수한다면, 이 신앙은 여전히 ‘젖만 먹는 어린아이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자녀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몸은 점점 커 가는데 정신이나 행동은 조금도 자라지 않고 늘 ‘응애 응애, 엄마 젖 줘’만 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결국 사람이 자라면서 차차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한 이치이듯,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까지 짊어질 사람으로 성장해야만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드러납니다.

 

 

2. 주님과 연합된 삶, 보배로운 질그릇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성숙해가는 신앙생활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는 실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숫자로 치자면 0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존재에 플러스가 되시면, 우리의 존재에서 예수님께서 드러나십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 우리를 ‘보배로운 질그릇’이라고 일컬은 것입니다. 저도 영적 사역을 할 때 예수님 능력이 저를 통해서 나오지만, 저 자신은 단지 하나의 질그릇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은 여느 그릇과는 또 다릅니다. 예수님을 담았기 때문에 이 질그릇은 ‘보배로운 질그릇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믿는 이들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보잘 것 없으나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기에 일반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도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물질, 권세, 명예, 자식, 신랑 등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내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이고, 또 보배로운 질그릇이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능력을 담아 주십니다.

나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엄청나게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 능력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항상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본문 말씀은 우리가 보배로운 질그릇이 되었을 때의 희망을 힘차게 전하고 있습니다. 8절부터 보면,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의 경우 만약 부도가 나면 그저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다. 부도의 이면에 있는 영적 실체는 바로 마귀가 그를 둘러싸고 포위하여서 부도가 나게 한 것입니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이러한 마귀의 장악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선인이든 악인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환란이 반드시 옵니다. 하지만 똑같은 환란이 오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거기에 맞설 힘이 스스로에게 없으며, 그들의 주인이 저 스스로였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들과 다른 까닭은 우리가 ‘보배로운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뭐라고 하였습니까? 지금 상황만을 잘라놓고 보면 전세는 불리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내가 이미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내 안에 예수님만이 온전히 살고 계신 이상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의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1장 2절 하반절부터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우주라는 것이 아주 기가 막힌 겁니다. 태양과 그 태양계에 속한 행성들, 지구와 달은 물론이고 모든 그 안의 것들이 서로 완벽한 균형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고 지탱하고 있는데, 지구 안에서 일어나는 기후 변화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주의 아주 섬세한 운행 원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하려야 할 수도 없는 우주가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나를 사랑하셔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나 하나만을 놓고 보면 약하기 그지없는데, 이 질그릇 같은 내 안에 하나님이 사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복을 받았습니까!

 

 

3.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내 안에 담기 위해서

 

그런데도 이 놀라운 복을 복음을 통해 늘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믿는 이들도 흔들리기 쉽습니다. 세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믿는 이들처럼 우리처럼 어리석은 이가 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의 원래 본질, 영적인 실상, 알면 알수록 무서운 영적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이 ‘온전히 100퍼센트’ 나의 주인이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가 나의 주인’인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언제나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말씀’ 을 순종하며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 용서하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측면이 전부가 아닙니다. 귀신을 쫓고 마귀와 싸우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치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큰 줄기를 모두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실질적으로 깨닫고 체득해 갑니다.

보배로운 질그릇은 질그릇이라는 ‘내’가 중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저 역시 몇 년 전에 충주로 가서 기도처를 세우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때 저도 주님께 제 나름의 이유를 얼마든지 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삶의 주인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핏 값으로 인해 제가 구원되었으며, 죽음에 이르기에 마땅한 죄악 덩어리였던 저에게 거룩한 영의 세계와 주님의 영광, 영원한 세계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할 때 다들 비슷한 과정을 통하여 결정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한 대학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사람들은 보통 열 가지의 가설을 순식간에 내놓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지, 또 저렇게 하면 저런 결과가 나오는데’ 하면서 하나하나 따지고 재면서 결정합니다. 무슨 일을 하나 할 때도, 사람 한 명을 만날 때도 자기 눈에 가장 옳아 보이는 방법을 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저도 이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가 주님을 만나고 보니, 주님이 기뻐할 일은 하나도 안했으며, 그분께서 슬퍼할 일만 골라서 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제가 하나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 판단은 무조건 잘못되었고 주님 판단은 무조건 선하시고 옳다. 그러므로 내가 판단할 건 앞으로 하나도 없고 주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대로 하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설사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우리가 고난을 받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은 지극히 크기 때문에 현재 받는 고난(훈련)은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하면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쁜 자식에게 매 한 번 더 대는 심정으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징계를 내리시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의 말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대로,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를 받지 않으면 사생아가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나는 끄떡없어. 주일 빼먹어도 내 사업은 잘만 되는 걸?’하면서 희희낙락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 문제없는 것이 아닙니다. 정 반대로 주님께서 그에게서 떠나신 겁니다. 하지만 주님과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영이 열려가면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이미 들어가 있는 사람이 만약 세상 사람들 마냥 엉뚱한 짓을 저지르면 바로 주님의 매가 들이닥칩니다. 이 징계가 믿는 이에게는 감사할 일이며,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 주님께 회초리 맞기를 원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는 삶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두려울 건 하나도 없고, 단 하나 주님만을 두려워합니다. 천군만마가 나에게 대적해도 나의 주님이 바로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 이러한 복된 삶을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본문 말씀 10절에 있듯, 예수님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에 들어가심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예수님과 일체가 되어, 나 자신이 죽어야만 예수님의 생명이 내 몸에서 나타납니다. 즉 내가 온전히 죽어 없어질 때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이것이 바로 ‘보배로운 질그릇’의 제 몫을 하는 삶이자, ‘예수님 권세가 내 권세’로 나오는 삶입니다.

우리 삶의 모범 답안은 언제나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이미 나와 있는 정답을 고대로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능 좋은 내비게이션을 달고 있는 자동차처럼, 이 내비게이션이 지시하는 대로만 따라간다면 천국을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이 갈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 지시를 따라가는 데 ‘삶의 지장’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어리석과 손해만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고난과 희생의 가시밭길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똑같이 지지 않으면서 ‘예수님 권세가 내 권세’라고 한다면, 이건 더욱 말이 안 됩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가만히 큐티 해보십시오. 나는 지금 얼마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고 있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사실 얼마나 이기적인가. 물론 주님께 기대어 내 삶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가 있다.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반드시 성장을 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고, 우리 각자 하나 하나가 보배로운 질그릇으로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동역자 까지 변화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상급받기 어려운 신앙입니다. 이 땅에서 한 인간으로 살면서, 주님 사업의 좋은 밑거름이 된다는 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세상 임금이 말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참으로 다릅니다. 세상 이치로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책임지실 것을 믿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자녀된 삶입니다. 어쩔 때는 이 길이 너무나도 힘듭니다. 때로는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 꼼짝없이 큰일 났다 싶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영광스러운 길은 세상에 더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짊어진 만큼 능력이 나옴을 오늘 말씀에서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첨부파일
카테고리 서모세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