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모세 목사님/양사라 원장님 말씀

성경을 알기 쉽고도 깊이있게 배워보는 코너입니다. 영적 깊이가 더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말씀에 제시된 환상 등은 원장님께서 개인적으로 받으신 내용으로 다른 성도분들께는 다른 이미지로 계시해주실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목 충성된 군사 (롬14:8)
작성자 기쁨
작성일자 2011-05-22
조회수 6920



충성된 군사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1. 주님께 효도함은 곧 충성이다





우리 몸은 육적인 어버이로부터 태어났지만, 실상 모든 인간의 어버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버이날 즈음에 제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하는 것이 참다운 효도이겠습니까?’라고 주님께 여쭈었을 때, ‘충성이 곧 효도’라는 응답을 받고 오늘 본문 말씀을 로마서 14장 8절로 택하였습니다.

주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즉 주님의 법에 열심을 내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의 삶을 사는 이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말씀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각자 10프로, 20프로 지키는 사람과 100프로 다 지키는 사람의 차이는 엄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대로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그 충성이 바로 온전한 말씀 준행입니다.

이 말씀에 기준을 둔다면, 우리 각자가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라고 살려주신 것이 되며, 죽는다고 해도 이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스펄전 목사는 82세의 생을 마칠 때 ‘주님께서 주셨던 생명을 다시 주님께 그대로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그대로 반납한다는 고백은 ‘나는 주님의 은혜로 창조된 피조물’임을 가장 근본적으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님의 자녀로서 모든 것을 주님께 ‘받고’ 산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영적인 효도인 ‘충성’을 그분께 오롯이 바쳐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보면 여러 가지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그 9개의 열매 중에도 ‘충성’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도 “그 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을 받았다면, 가장 우선시 되어야할 것이 충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앞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각 지파의 대표를 뽑아 가나안 정탐을 보냈습니다. 정탐에서 돌아온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이어 온 백성이 술렁이며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충성하였지요 (민 14장). 출애굽부터 시작하여 광야 길을 건너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매일 매일 맛보았던 이스라엘 민족은 걸핏하면 불평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나 반역을 자주 저질렀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현현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현실적인 어려움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이들의 태도가 잘 이해가 안 될 지경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들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삶의 환난 앞에서 '나는 이제 다 죽었다’며 불평하는 적이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 역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광야를 건너는 것'에 빗댈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자 내가 다 해 줄 테니 너희는 그냥 받아먹기만 해라’ 하시며 우리가 손 하나 까딱도 하지 않은 채 은혜만 누리게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만, 이 분은 언제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 자녀가 내가 준 달란트대로 충성을 하는가, 나를 참으로 신뢰하고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내 뜻에 복종을 하는가’를 달아보시면서 복을 주시기도 하고, 견책하시기도 합니다. 시편 101장 6절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라고 하셨지요. 즉 충성하는 자는 완전한 길을 걷는 자입니다.





2. 어떤 충성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자, 이미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각 사람에게 맞추어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개인적 종말이든 우주적 종말의 날이든,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서 결산을 치루는 날이 종국에는 반드시 옵니다. 만약 한 달란트를 받은 어떤 사람이 더 많이 받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에이, 왜 난 요만큼 밖에 안주셨어. 저 사람은 능력도, 돈도, 권력도 많이 주셨으면서! 저 교회는 크고 부흥하는데 왜 우리 교회는 이 모양이야. 에라, 안한다. 나중에 그냥 받은 것이나 그대로 드려야겠다’ 며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파묻는다면, 이 사람은 심판 날에 이르렀을 때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 이라는 말을 듣고 밖으로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충성은 누가복음 19장 10절 말씀대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없이 현재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양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시기에 부족한 것도 전혀 없으십니다. 오직 우리가 각자의 능력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말씀에 충성하는 모습을 볼 때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또한 충성은 군대의 충성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군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군사들이 적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싸우지 않는다면 전쟁을 치룰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군사에 대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공격해 들어갈 때, 강을 건너기 위해 임시 가교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자꾸 흔들려서 군사 몇몇을 보내 가교를 붙잡게 하였습니다. 전군대가 건너간 후 그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보니, 가교를 붙잡고 있던 이들이 모두 선 채로 얼어 죽어 있었더랍니다.

세상의 전투에서도 사람은 이렇게까지 충성을 합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의 전투는 영적 전투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세계에 입문하였던 처음에는 몰랐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그저 ‘종교 생활’ 하라고 부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 소속된 군사로서 마귀와의 전쟁에 임하여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서 충성하여 승리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충성된 군사가 되는 일이 무척 힘이 듭니다. 저도 종종 영몽을 받는데, 차를 타고 산비탈을 올라가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이 비탈이 진흙길이고 경사 각도도 아주 깎아지른 듯이 가파릅니다. 그래서 자동차는 올라가려고 할 때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서, 아예 금세라도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은 분명히 차가 뒤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찌된 일인지 차는 올라가지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힘을 다해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가면, 어느새 주님의 힘으로 차가 올라갑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훈련 과정을 이러저러한 꿈으로 자주 보여주십니다. 높은 탑 꼭대기에 제가 올라와 있는데, 그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이고 저는 그곳이 너무나 추워서 벌벌 떨면서 겨우 지탱하고 있는 형편인 제 모습을 보여주신 적도 있습니다.

저 역시 충성심 하나만으로 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충성심이 없다면, 연약한 인간인 저도 도망 갔을지 모릅니다. 주님이 시키신 일을 할 때도 딱 시키신 그만큼만 해도 됩니다. 그러나 제 충성은 주님이 주신 달란트에서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충성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달란트를 주신 이유는 그저 우리의 자랑을 위해서도 아니고, 달란트를 가지고 즐기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달란트를 사용하여 주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이며, 남에게 주시지 않는 귀한 달란트를 나에게 주셨다면 그럴수록 더 큰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주님의 일을 할 때 충성하지 않으면, 받은 달란트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가나안 정탐 사건에서 10명이 낙심하고 있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니다, 우리가 들어가서 정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확신은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데에서 왔기 때문에 10명의 부족 대표들이 외형적인 요건만을 보고 두려워 떨 때, 이 두 사람만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민14:9)”고 말했습니다.

‘갈 렙’이라는 이름을 우리나라 말로 풀면 ‘개’라는 뜻입니다. 개는 늘 주인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충성된 일꾼이라면 한시도 쉬지 않고 ‘내가 오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일이 무엇이 있을까?’ 를 고심하고, 날마다 실천합니다.



주님을 따를 때, 그 전제가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이것이 의무인데’하면서 율법 안에만 머무르는 사람과, 작은 일 하나를 하더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는 사람은 아주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이제 우리는 로마서 7장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말씀처럼 법의 차원을 넘어선 섬김을 드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정부를 채용하기 위해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한다. 7시에는 나에게 조반을 주고, 9시에는 집안 청소를 해야 한다’ 등의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가정부 한 명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지내다보니 정이 들고 서로 사랑하게 되어서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가정부에서 이제는 집주인의 부인으로 신분이 바뀐 이 여자가 ‘이제는 결혼했으니까 종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밥을 해 줄 이유도 없다’ 고 해야겠습니까?

이 것이 율법과 은혜의 법의 차이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인 이상 기본입니다. 하지만 은혜의 법은 조문 하나를 지켰냐 어겼냐의 차원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니까 더 일찍 일어나서, 더 맛있는 음식을 해드려야겠다’는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로마서 7장 6절의 본뜻이 이렇습니다. ‘나는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가 되었으니 내 맘대로 살자’가 아니라, ‘아! 예수님의 피가 나를 살리셨다, 저 분이 나를 살리신 주인이시고,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내 신랑이시구나! 내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이시구나’ 의 감격으로 기쁘게 충성을 바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율법에 얽매여서 사는 것과 은혜의 법에 따르는 것의 차이점은 ‘즐김’입니다. 전에는 봉급을 타기 위해 마지못해 일하던 가정부였을지 모르지만, 주인과 나의 관계가 사랑하는 관계로 정립되면서 요한복음 15장 15절의 말씀 그대로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모든 하늘나라의 비밀, 즉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3. 목숨을 내 건 충성으로 모든 것을 이기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후사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런데 상속자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상속자가 되었으니 내 맘대로 자유다. 복을 받아 인생을 즐길 일만 남았다’ 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후사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영광스러운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에', 나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것이 주님과의 일치된 삶이며,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충성하는 것이 바른 삶입니다. 더 이상 ‘이것이 죄이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를 논하는 단계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고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주님의 길을 충성되게 걸어갈 때, 반드시 마귀들이 닥칩니다. 그들은 우리 삶 속에서 갖가지 환란을 주고, 시험을 하려고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들의 권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마땅히 겪을 고난을 아십니다. 하지만 이 환난 가운데에서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이미 마련해놓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므로 환경에서 오는 시련 및 마귀의 억압이 두렵고 힘이 들지만, 우리는 항상 ‘폭풍우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귀의 시험과 환란이 두렵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도 함께 계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충성하고 나에게 매달리면 내가 반드시 이기게 만드리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뭐라고 있습니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모두 시험을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에 피할 길 또한 그 분이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어떤 역량이 아닙니다. 필요한 능력은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면 됩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가슴이 뜨거운 충성, 목숨을 내거는 충성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영적 능력을 받아 다른 이들을 치유해주고 싶은 사람,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은 사람, 봉사하고 싶은 사람, 충성하고 싶은 사람들 안에서 불 붙듯이 일어나는 소망들은 모두 성령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마음을 주시는 이도 성령님이시고, 행하시게 하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여러분, 남들과 비교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오직 주님과 나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내 주님이 기뻐하실 일’에 목숨을 바치는 충성이 참된 신앙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살던 와중에 한번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면 원이 없겠다’고 혼잣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 윗의 가장 용감한 부하 세 명이 이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아주 충성된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블레셋 군의 점령 아래에 있었지만, 이들은 위험을 전혀 개의치 않고 적지로 숨어들어가 우물물을 길어왔습니다. 그들이 다윗에게 물을 주자, 다윗은 그 물이 그냥 물이 아니라 이 세 명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이 목숨 값을 치루고 가져온 물을 받으실 수 있다며, 그 물을 그대로 따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삼하 23장). 우리의 충성 역시 이 세 용사의 충성을 모범으로 하여야 합니다.



처음부터 큰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하는 사람은 가장 작은 일도 주님께서 맡기신 큰일과 똑같이 받아들여서 충성합니다. 그래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일과 사건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테스트 해 보십니다.

주 님께서 주시는 테스트는 ‘이 종이 과연 큰일을 맡을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보시기 위해 일단 작은 고을을 맡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고을을 잘 다스리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충성을 바칠 때 주님께서는 큰 고을을 맡기십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도 크게 쓰임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지만, 충성 역시 작은 일에서부터 차곡차곡 준비와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목숨을 다 할 때,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효도에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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